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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어리석은 자가 지혜를 배우는 산

다시 왔다, 지리산!


'어리석은 사람(愚者)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智者)으로 달라진다는 지리산(智異山)'은 내 인생 산이다.


대학 1학년 때 동아리 엠티로 처음 왔고, 제대 후 가출하여 숨어든 곳이었다. 이십년이 지나 동료 사제들과 다시 종주를 했고, 그로부터 십년이 지난 오늘 다시 오른다. 


이런 페이스라면 다음번 지리산을 오를 때는 환갑이겠다.


지리산은 쉬운 산이 아니다. 한라산(1,950미터) 다음으로 높은 1,915미터 천왕봉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공원(1967년)으로 그 넓이도 여의도 면적의 52배로 최대다.


어떻게 하루만에 정상을 오를 것인가 고민하다가 중산리에서 장터목을 거쳐 천왕봉에 올랐다가 로타리 대피소를 거쳐 회귀하는 12.4킬로미터의 코스를 선택했다. 9시간 산행에 난이도 역시 어려운 코스다.


주일미사 후 식사를 하고 바로 출발했다. 중산리에 도착하니 10시 30분이었다. 그런데 중산리 주차장(산청군 시천면 지리산대로 345)이 공사중이라 차를 돌려 주차가 가능한 곳으로 내려가야 했다. 


11시 지리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산이 깊어 공기가 다르다. 물이 맑아 그냥 마신다. 이곳에 계속 머물고 싶다. 


숨은 턱밑까지 차 오르지만 쉬지 않고 꾸역꾸역 오르니 오후 1시에 장터목 산장에 도달했다.


나만 십년의 나이를 더했지 산은 늘 그대로다. 새침한 눈으로 고개를 드니 새하얀 구름 새파란 하늘이 환하게 웃으며 나를 맞는다. 그래, 지리산은 원래 늘 넉넉했다.


거의 삼십년 전 장터목에서 처음 들었던 노래를 듣는다. 


내가 만일 하늘이라면 그대 얼굴에 물들고 싶어
붉게 물든 저녁 저 노을처럼 나 그대뺨에 물들고 싶어
내가 만일 시인이라면 그댈 위해 노래하겠어
엄마 품에 안긴 어린 아이처럼 나 행복하게 노래 하고 싶어
세상에 그 무엇이라도 그대 위해 되고 싶어


제대 후 가출해 지리산을 헤메다가 장터목에 이르렀고 노을을 바라보며 쌀을 씻는데 라디오에서 안치환의 <내가 만일>이 흘러나왔다. 


'붉게 물든 저녁 저 노을처럼 나 그대뺨에 물들고 싶어', 내 마음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알아온 민중가수 안치환마저 지리산에서 변한 것 같았다. 다음날 산을 내려왔다.


나에게 그대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를 위해 무엇이 되고 싶은걸까? 여전히 답이 없는 질문을 하면서 천왕봉으로 오른다. 


십년전 칠흙같은 새벽녘에 일출을 보기 위해 서둘렀던 길이 환하게 펼쳐졌다. 그때는 정말 길고 험했던 길이 지금은 꽃단장한 새색시처럼 곱다.

2014년 10월 천왕봉 일출


오후 2시에 천왕봉 정상에 섰다.


아, 아름다운 풍광! 십년전 일출을 기다리면서는 보지 못했던 것을 이제야 본다. 


구상나무, 펼쳐진 지리산, 구름, 바람, 저멀리 작은 문명의 흔적까지 맑은 하늘 아래 한아름이었다. 잠시 속세를 떠나 '한국인의 기상이 발원되는 곳'에서 호연지기를 느낀다.


전날 내린 비로 미끄러운 길에서 몇번이나 넘어지면서 내려왔다. 출발지점으로 돌아오니 오후 4시가 조금 넘었다. 걱정했던 산행을 무사히 마쳐 기뻤고 무엇보다 지리산을 다시 만나 행복했다. 


지리산아, 환갑에 다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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