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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게 좋아 May 22. 2024

대기업 파견직 근무 한 달 차

꼰대는 자기가 꼰대인 줄 모른다

종로, 회사 옥상에서. 이곳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이 회사에서의 유일한 낙이다. 비가 그친 후 오랜만에 미세먼지 없는 맑은 날.


대기업에 파견직으로 입사해 최저임금 수준의 월급을 받으며 일하고 있는 요즘. 이곳에서 일한 지 한 달이 넘었다. 숨쉬듯 현타가 밀려오고 웃음을 잃은 지 오래다. 직업이란 것. 일이란 것. 나는 그런 것에 열정 없다. 직장에서 자아를 찾거나 성장을 도모하는 타입은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따로 있다. 하지만 주어진 일은 열심히 하고 성실하다. 내 일을 못해 남에게 피해를 주진 않는다.


그래. 일은 편하잖아.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고 자유롭잖아. 스스로를 설득하며 애써 회사의 장점을 찾으려 노력한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회사에 정이 붙질 않는다.


더군다나 얼마전 팀장의 말을 듣고 그 사람에게 정 떨어지는 동시에 이 조직이 혐오스러워졌다. 사실 입사 후 주말근무가 있다는 사실에서, 그리고 곧 퇴사할 사수에게 다양한 뒷얘기들을 전해들으면서부터 이 조직이 싫어졌는데 팀장의 발언으로 이 부정적인 감정이 급물살을 탔다.


내가 지원한 공고에는 분명 초과 근무 시 수당을 지급한다고 되어있었지만 같은 부서 사람에게서 올해 초부터 수당이 없어졌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다. 게다가 출장이 잦은 업무인데, 출장이 있는 주 일요일 오후에 미리 출장지로 가서 일을 하거나 일은 하지 않더라도 미리 들어가 숙박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면접 때도 전혀 들은 바 없는 얘기다. 사수는 면접관들이 일부러 그 사실을 숨겼을 거라고 말했다. 일요일부터 출장을 가야 하는데, 출장비가 없는 건 고사하고 출장지에서는 매일 초과 근무가 발생하고, 그에 따른 어떠한 추가 수당도 없다.


미친 것 아닐까? 정규직도 아니고 최저임금 주는 파견직에게 이런 열정페이를 강요하다니. 이 사실 때문에 사수가 이 회사에 입사하기 전 몇 명이나 입사 며칠만에 나가버리는 줄퇴사가 발생했고, 다니더라도 계약 기간을 채우는 사람이 드물다고 했다.


원래라면 내 사수가 되었을 사람이 급하게 퇴사한 사유를 들었다. 퇴사 전 그녀에게 과도한 출장 업무가 집중적으로 부여되어 회사와 갈등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경기도에 사는데, 출장을 위해 일요일에 서울까지 캐리어를 끌고 온 다음 다시 경기도 외곽인 출장지로 이동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출장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최저임금을 받으며 일요일에도 무상근무를 하고, 출장지에서 매일 초과 근무를 해야 하는 것에 그녀는 체력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큰 부담을 느꼈고, 초과 근무 수당이 없어진 후 너무 낮은 급여로 생활이 어려워지자 주말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고 부장에게 호소하다가 반강제적으로 회사를 나가게 되었다.


회사에 알리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윤리경영실에 스스로를 신고하라는 말을 들었다나.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세 명에게서 들었고 개인적인 감정이 섞였겠지만 내용은 같았다.

회사 옥상에서 빌딩숲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숨이 막힌다.

나는 정말 많은 아르바이트를 해왔는데, 내 경험 상 공기업이나 대기업의 경우에는 초과 근무 수당을 철저히 챙겨주었다. 이 외에도 임금은 최저로 줄지언정 법을 어기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정규직도 계약직도 아닌 파견직에게는(계약서에 최저시급과 근무 시간이 명시되어있다. 포괄임금제도 당연히 아니다.) 초과 근무 수당을 챙겨줄 줄 알았다. 이 점에서 놀랐고 충격도 받았고, 곧 혐오스러워졌다.


국내 10대 대기업이잖아. 아니 10대가 뭐야. 5대 안에 들어가는 메이저 중 메이저 대기업이잖아. 그런데 정규직도 아닌 알바 취급받는 파견직을 이런 식으로 취급하는 것이 말이 되나. 내가 파견직이 아니라 아르바이트생으로 들어왔다면 오히려 철저히 챙겨줬을 수도.


얼마 전 팀장이 나를 포함한 신규 입사자 두 명에게 점심을 사주면서 이 사건을 언급했다. 그는 내가 면접 볼 당시 들어온 면접관 중 한 명이었는데, 첫인상이 굉장히 좋았다. 면접관들 모두 느낌이 좋았고, 입사하게 된다면 함께 일하게 될 것이라기에 내 직감을 믿고 입사를 결정했다.


내 직감이 형편없었던 걸까…


팀장은 괜찮은 사람으로 보였다. 한참 어린 나에게 존댓말을 쓰고 예의있게 말하며 자신의 팀원들에게도 잘하는 듯했다. 직속 팀장은 아니지만 나는 업무 특성 상 여러 부서와 번갈아가며 일해야 하기 때문에 그와도 곧 함께 일하게 될 것이다. 여러모로 그에 대한 평가가 나쁘지 않았고 내가 한 달간 지켜본 바로도 인성적으로 문제될 게 없었다. 마주칠 일도 별로 없긴 하지만.


팀장은 반강제로 퇴사하게 된 사람의 이야기를 하며 우리에게 작은 것에 집착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그녀의 면담 당시 부장은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하며 일요일에 출근이 어렵다고 말하는 그녀를 이기적이라고 생각했고, 그녀를 자신의 사익만 챙기려는 인간으로 평가해 매우 싫어했다고 말했다. 일요일에 출근하는 것. 추가 수당을 못 받는 것. 팀장은 그녀가 그런 작은 것에 집착하다가 쫓겨났다며 열심히 배우고 경험하라고 말했다.


배우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정규직 직원들이 업무에 대해 많이 알려줄 것이며, 이곳에서 얻어가는 것이 많을 것이라고 했다. 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친해진다면 인적 재산이 될 거라며 우리의 미래를 응원한다고 했다.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란 이야기였다.

나는 팀장에게 묻고 싶었다. 당신이 우리의 처지에 있었다면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느냐고. 나는 스스로를 오롯이 책임져야 한다. 1인 가구인 나는 내 집안의 가장이다. 이 회사에서 받는 월급으로 생활하고 돈을 모으고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당신과 똑같이.


말해주고 싶었다. 나도 당신처럼 대기업의 정규직이었다면, 지금 내 월급의 두 배, 세 배를 받고 법인카드로 원하는 점심을 공짜로 사 먹을 수 있고, 큰 성과금을 받고 회사가 제공하는 복지를 누릴 수 있다면, 경력이 될 수 있는 업무를 수행한다면, 나의 커리어를 쌓을 수 있는 임무를 맡는다면 나무가 아닌 숲을 볼 거라고. 그녀도 마찬가지였을 거라고.


초과 근무, 싫기야 하겠지만 지금 정도의 초과 근무는 수당 없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일을 배울 수 있고 내 경력을 쌓을 수 있다면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


적극적으로 행동하며 이곳에서 많은 것을 배워가라고? 이곳에서 파견직들은 회의에 참여시키지 않는다. 업무는 철저히 분담되어 있다. 업무는 물론 누구나 할 수 있는 단순한 일이며, 물경력이 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파견직들만 모아 한 부서에 몰아넣었으며, 업무 외 정규직들과 이야기할 기회도, 이유도 없다. 정규직들이 파견직 사원들을 무시하거나 차별하는 것은 아니지만 서로 점심도 함께 먹지 않는다.


하고 싶은 말이 수도 없이 떠올랐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웃어보이곤 밥만 먹었다.


그날 이후로 이곳에 대한 환멸이 심해졌다. 당장 돈을 벌어야 하기에 참고 다니고 있는 내가 싫다. 난 지금 주말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회사에 알릴 생각은 당연히 없다. 어차피 걸릴 일도 없고 계약서에 겸업 금지 조항도 없다. 담당자가 회사에 겸업을 하겠다고 보고하고 본업에 문제가 없다면 가능하다고 말했다. 물론 너한테 알릴 생각은 없고.


팀장은 파견직들의 초과 근무 수당을 부활시키려는 절차를 진행 중이라고 했지만 기대는 없다. 언제 성사될지 모르는 기약 없는 일이란 것을 안다.


정규직으로 전환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같은 임금을 달라는 것도 아니다. 계약서에 명시된 내용을 지켜달라는 거다. 추가로 근무할 시 그에 따른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달라는 것뿐이다. 이런 요구가 이기적인 주장이 되고 반강제적으로 회사에서 쫓겨날 이유가 되는 걸까. 애초에 파견직들은 연봉제가 아닌 시급제로 계약되어있다.


너도 쫓겨나기 싫으면 참으라는 상급자들의 무언의 압박에 반발심이 든다. 그게 좋아님. 그게 좋아님. 예의 차리며 웃는 낯짝들을 한 대 때리고 싶다. 


문제가 될 만한 사실들을 숨기며 예의바른 낯으로 웃는 그 얼굴들이 가증스러워 참을 수가 없다. 다른 파견직 사원이 말해주지 않았다면 나는 직접 출장을 가기 전까지 일요일에 미리 출장지로 가야 한다는 것도, 초과 근무 수당이 없다는 것도 전혀 알지 못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고의로 숨겼다는 사실에 큰 배신감을 느꼈다. 나름 괜찮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기에 실망과 미움은 더욱 커졌다.


초과 근무에 대한 증거를 모아 퇴사 후 고용노동부에 고발할 생각도 가지고 있다. 사수는 대부분의 회사에서 이전 근무한 회사에 연락해 직원의 평판을 조회하는 레퍼런스 체크를 하기 때문에, 그리고 이 바닥이 좁기 때문에 지금 겪는 일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지만 신고할 생각은 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나는 대학교에서 1980년대 한국 노동문학을 주제로 졸업논문을 작성했다. 평소 노동자와 노동이란 주제에 관심을 가져왔기에 더 현타가 오고 분노가 쌓인다. 1970~80년대 노동자의 현실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고 공부하며 그 열악하고 비참한 현실에 충격을 받고 눈물을 흘린 적도 있는데. 지금 이 꼬라지를 보면 전태일 선생님이 하늘에서 눈물을 흘리시지 않을까… 


그럼에도 이곳에 남아있는 내가 싫다. 이것이 일이 고되지 않음에도, 나를 불편하게 하거나 괴롭히는 사람이 없음에도 이 회사에서 내가 고통스러운 이유 아닐까. 여기에는 나의 내밀한 학벌주의 또한 숨겨져있다. 


내가 이 돈 받고 이런 취급 받으면서 여기서 일할 사람이 아니라는 은근한 우월감과 열등감이. 내가 왜 고졸, 전문대졸들과 같은 월급을 받으며 일해야 하고 정규직들보다 못한 게 뭐냐는 자만심감과 학벌 콤플렉스가. 이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풀어보려고.


그럼에도 아직 회사를 다니고 있고 장점 또한 있는 것은 맞으니 내 정신건강을 위해 회사의 좋은 점을 찾아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정말 이곳이 그저 쓰레기 같기만 했다면 진작 퇴사했을 것이다.


사람 좋아보이던 팀장의 꼰대 발언 이후 이 조직에 환멸이 나고, 모두가 너무나 가증스러워 보이지만 당장은 어쩔 수가 없다. 현실에 타협하고 포기한 청년으로 보이고 싶지는 않다만, 대신 이 회사에서 열심히 일할 생각이 전혀 없으며 근로 의욕 또한 수직 하강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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