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저녁 한심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는 남편. 나조차도 내가 그래 보였다. 남편을 뭐라 하면 안 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11월 7일 큰아이는 9월에 입학한 대학에서 6주간 스페인으로 떠난다. 4년간 해마다 두 달간은 해외 기업 탐방을 하며 더 넓은 세상에서 보고 배우는 공부를 한다는 건 입학 전 알았지만 이렇게 빨리 다가올지는 몰랐다. 입학 전 안내로는 내년 5월이나 6월이라고 분명히 공지가 되었다. 입학하고 2달 만에 이렇게 빨리 해외일정이 잡히게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둘째 아이도 그렇다. 내년이면 고등학교 입학은 당연히 집안 인문계 학교일 거라 생각했다. 마음 같아서는 대안학교 입학을 했으면 하는데 그건 싫단다. 아무리 생각해도 잡기에 능한 둘째 아이를 대학입시를 위한 공부는 아닌 듯해서 최근 알아본 학교가 특성화고등학교다. 지난주에는 학교 교감 선생님과도 1차 상담을 하고 마음에 들어 입학 절차를 밟으려고 했더니만, 하필이면 내가 제주 여행과 맞물려서 진로 탐방이 있었다. 큰아이야 스무 살이고 스페인 가기 위한 비행기 탑승은 스스로 할 수도 있건만 작은 아이 경우는 아니다. 집에서 떨어져 있는 학교라 남편이든 나든 누구든 데려다줘야 한다. 남편 보고 학교 진로 탐방길 데려다주라고 했더니만 ‘그러고도 네가 엄마라고 할 수 있냐?’라는 표정을 지었다.
11월 제주 여행은 실은 제주 올레길 축제를 가기 위해 5개월 전 예약을 해두었다. 이쯤 되면 1년 내내 방구석에 앉아 컴퓨터 앞에서 씨름했던 책 쓰기가 완성이 되겠구나, 그때 되면 훌훌 털어버리고 여행 좀 다녀와야지 했던 것이다.
첫 책쓰기여서 그런지 힘겨웠다. 끝이 보일 것 같지 않던 첫 책 쓰기에서 잠깐 외도를 했던 것이 작년 11월에 전자책 쓰기도 한 권 뚝딱 한 달 만에 완성했다. 그뿐이랴. 올해 여름 즈음 중앙도서관에서 읽걷쓰 출판 창작소라는 프로젝트에 합류해서 책 읽는 우리 가족 공저책도 어제 드디어 마무리가 되었다. 아직 한 권은 출판사를 만나기 전이지만 어찌 됐건 1년 만에 전자책 포함 총 3권의 책이 완성이 되었다.
나를 위한 쉼의 시간을 제주 올레길 축제에서 즐기다 오려고 했는데 세상에 둘도 없는 한심한 엄마로 추락하고 만 것이다. 만약 제주를 가지 않는다면 ‘엄마의 희생은 위대하다. 엄마 고마워요.’ 두 아들 녀석들은 할 수도 있겠다.
착착한 심정으로 어젯밤 잠자리에 들었고, 이른 아침 기상을 하고 논어필사를 마치고 멍하니 앉아있었다. 핸드폰 속 여러 개의 톡방은 아침부터 요란하게 울려대는데 생태교사들의 방에 올라온 초지님의 상강 절기 편지가 눈에 들어왔다.
이런 상강 편지글이 올라오길래 절기 서당의 한로 절기가 눈에 들어와서 읽어보게 되었다. 어제까지가 한로고, 오늘부터가 상강인 것이다.
기적을 만나는 시간, 봄날 뿌려둔 씨앗이 몇십 배 되는 기적을 한로에 만나게 된다는 것. 봄부터 가을까지 씻나락으로 다음 해를 준비한다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봄부터 씨앗을 뿌려서 잘 살아왔다면 가을엔 몇 배로 불려서 돌아온 기적 같은 씨앗 중에 내년에 씨 뿌릴 종자로 고르는 작업을 하라는 내용이 이었다.
뭔가 의미심장한 말 같은데 머릿속에서 정리가 안 되었다. 걷자. 걷다 보면 정리가 되겠지?라고 아침 먹기 전 걸으러 나갔다. 늦가을답게 집 앞 길거리 단풍은 최고 절정을 이루며 울긋불긋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어제 내린 비 덕분에 땅에서 올라온 흙냄새와 낙엽냄새가 범벅이 되어 코를 자극한다. 싫지 않은 냄새다. 올망졸망 나뭇가지에 걸쳐진 열매도 한해 고생 많았구나 싶었다. 봄철 꽃 피우고, 여름내 햇볕에 땀을 내면서 열매를 키워가더니 가을이 되니 주렁주렁 열매가 가득하다. 가을은 기적을 만들어내는 계절 맞다.
‘그래, 미안해하지 말자. 예정대로 멋지게 제주 올레길 다녀오자. 누가 뭐래도 나도 저 나무들처럼 한해 씨앗 잘 키워서 열매 맺지 않았는가? 대신에 내년에 심을 볍씨 고르기 하고 오자.’
옷깃을 잔뜩 추켜 세우며 걸었던 산책길, 한해 살아온 기적을 축하하고 살아갈 기적을 만들어오면 될 일이 아닌가? 아니 제주 올레길 말고도 더 멋진 길을 걸어보자. 올해가 가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