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동희 Apr 20. 2024

아소카 대왕의 팔만사천탑

간다라 이야기 #18

세계적 종교의 탄생은 훌륭한 교리나 지도자의 출중한 능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여기에는 가 단위의 전폭적인 지지가 동반되어야 세계적인 종교로 성장이 가능하다. 기독교는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있었기에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고, 불교는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대왕(IAST: Aśoka, BCE 304 ~ BCE232)'이 있었기에 세계적인 종교가 될 수 있었다.



근본팔탑에서 팔만사천탑으로


기원전 544년(혹은 기원전 483년) 석가모니가 80살의 나이로 열반에 이르렀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석가모니를 추종하고 있었기에 권력자들은 자신의 지역에 석가모니 사리탑을 만들고자 하였다. 결국  바라문의 중재로 그 자리에 모인 여덟 세력 모두에게 사리를 동등하게 나누어, 석가모니 사리탑을 각각 원하는 위치에 건립하기로 정리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탑들을 '근본팔탑'이라 부른다.


시간이 흘러 기원전 260년 경, 아소카 대왕은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마우리아 왕국 내에 전파하고자 하였다. 그 방법 중 하나로, 사람들이 많이 모여사는 큰 도시마다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모신 사리탑을 건립하기로 하였다. 이를 위해 기존의 근본팔탑 중 일곱 탑을 해체하였고, 안치되어 있던 사리를 나누어 전국에 보내었다. 이 때 수많은 탑들이 건립되었는데, 이 탑들을 아소카의 팔만사천탑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아소카가 건립한 것은 스투파가 아니라 비하라라고 기록되어있다. 비하라는 탑이 아니라 승원을 의미하는데, 일반적으로 스투파와 세트를 이루기에 큰 틀에서의 의미는 같다. 따라서 여기에서도 팔만사천탑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사용하고자 한다. 한편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팔만사천'이라는 숫자이다. 실제로 팔만사천 개의 탑이 조성된 것이 아니라 팔만사천이란 이 지역에서 사용되는 관용어로 어마어마하게 많은 수를 의미한다. 요약하자면 아소카는 기존의 석가모니 진신사리탑을 해체하여 전국에 많은 수의 진신사리탑을 건립하였고, 아소카 대왕의 의도대로 마우리아 왕국 곳곳에까지 불교는 확장될 수 있었다.


아소카의 팔만사천탑은 당시 전국 각지에 건립되었지만, 이천 삼백 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지금까지 전해지는 탑의 수는 손에 꼽힌다. 인도아대륙에서 불교가 꾸준히 신봉되었다면 보존이 양호했겠지만, 대부분의 지역이 힌두교 혹은 이슬람교로 개종되며 불탑들은 방치되었다. 아마도 당시에 건립한 것 중에서도 외관상 훌륭하거나 거대한 탑들 몇몇만 지금에 전해지고 있을 것이다. 간다라에도 많은 수의 스투파와 승원들이 있는데, 그중 최소 두 개의 탑이 아소카에 의해 건립된 것이라 전해진다. 하나는 탁실라에 위치한 다르마라지카 스투파이며, 또 다른 하나는 스왓 지역의 부카라 스투파이다.


(좌) 다르마라지카 스투파, (우) 붓카라 스투파[출처: 위키피디아]

돌기둥에 새겨진 아소카 대왕의 뜻


아소카는 팔만사천탑 외에도 석주와 석비를 설치하여 불교의 뜻을 전파하고자 하였다.


(좌) 바이살리의 아소카 석주 [출처: 위키피디아], (우) 샤바즈가리의 아소카 석비


석주는 아소카의 기둥, 법(담마)의 기둥 등으로 불린다. 아소카의 기둥에 대한 기록은 현장의 대당서역기에서도 등장하는데, 현장의 기록에는 총 15개의 기둥이 기록되어 있다. 석주의 높이는 대략 12~15m 정도이며, 꼭대기에는 사자, 코끼리 등의 동물장식이 놓인다. 기둥의 형태는 그리스 건축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지금도 10여 개의 석주가 전해지며, 석주 장식만 전해지는 경우도 많다.


석주는 대석주와 소석 주로 구분되는데, 이 구분에 따라 쓰여있는 명문의 내용이 달라진다. 대석주로 구분되는 비문에는 통치 이론이나 도덕, 규정과 같은 내용들이 담겨있고, 소석주로 구분되는 비문에는 불교와 관련된 내용이 쓰여있다. 그래서 소석주는 부처의 성지와 같은 곳에 주로 설치되어 있다. 아쉽게도 간다라 지역에서 석주는 확인되지 않는다.


석비도 석주와 같이 대석비와 소석비로 구분된다. 내용도 대석비에는 통치와 관련된 것이, 소석비에는 종교와 관련된 것이 담겨있다. 석주는 주로 왕국의 중심지 주변에 많이 설치된 반면 석비는 세력이 닿는 주변국에도 설치되었다. 간다라 지역에서는 두 개의 대석비를 볼 수 있다. 하나는 만세라(Manshera) 석비이고 또 다른 하나는 샤바즈가리(Shahbazgarhi) 석비이다.


(좌) 샤바즈가리의 석비 관리인, (우) 보호곽이 둘러쳐진 샤바즈가리 석비


필자는 샤바즈가리 석비를 실견하였는데, 정부에서 보호곽을 설치하여 보호하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오래된 비석이 주로 6세기, 지린성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의 경우 5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에 비해 거의 800, 900년이나 이른 기원전 3세기에 만들어진 비석, 게다가 세계사에서도 특별한 아소카 대왕이 남인 기록이라는 사료적 중요함을 생각하니 깊은 감동이 밀려왔다. 다만, 파키스탄에는 더 이상 불교도도 마우리아 제국을 계승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없기에, 한적한 이 분위기 아쉬움으로 느껴진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소카 대왕 이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