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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희 Jan 03. 2021

여름날의 산책

또 하나의 고향

동네 산책을 즐겨하는 편이다. 특히 사람이 별로 없는 주말 오전 시간에 나가는 것을 좋아한다. 이때만큼은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대신 자연의 소리를 귀담아들으며 코에 찬바람을 넣는다.


우리 동네는 시가지를 중심으로 운하가 두르고 있어서 가로수길과 물가를 산책하기에 좋은 코스가 있다. 예전의 것을 잘 유지 보수한 건물들 덕에 산책길은 보는 재미도 더러 있다. 알고 보면 100년이 넘은 집들이 주는 고즈넉함과 벽면에 비친 햇살이 주는 아늑함은 자연스레 발길을 이 쪽으로 이끌게 한다.


산책길 시작

낮은 높이의 집들이 주는 안정감이 있는 것 같다. 특히 낮은 건물들 위 넓게 펼쳐져 보이는 하늘은 10분에 한번 꼴로 계절을 바꿔 대는 이곳의 날씨 덕에 꽤나 볼만하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나는 높은 건물과 고가도로들이 조각내버린 서울의 하늘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 보이는 하늘이 아니라 늘 도심이 만들어 낸 천장의 구멍을 들여다보는 느낌이랄까. 물론 남산과 한강이 만들어내는 조화는 참으로 그립지만 산이라고는 없는 곳에서 살며 그동안 못 본 다양한 하늘의 움직임들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산책길의 반환점에 도달하면 중심지 안쪽에 흐르는 운하를 만나게 된다. 운하 바로 옆에도 집들이 있는 것이 이 곳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풍경이다. 여름이 되면 주민들은 모두 운하에 걸터앉아 광합성을 즐기곤 한다. 그리고 특히 운하가 주는 지리적 이점 덕에 이곳에서는 뱃놀이가 상당히 일반적인 액티비티 중 하나다. 백야가 있는 이곳의 여름엔 사람들이 정박하거나 빌려온 배를 항해하며 한 손엔 시원한 맥주를 쥐고 물과 바람과 선탠을 즐긴다. 그 모습을 볼 때면 '아, 저게 인생이지'라는 생각을 하며 한량적 라이프스타일을 다짐하곤 했다.


반환점 그리고 가장 멋지다 생각한 동네 집 디자인
가장 좋아하는 골목


반환점을 돌아 집을 향해 다시 걷다 보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골목길이 등장한다. 이 길에는 유독 파스텔 톤의 집들이 많아서인지 밝고 따뜻한 느낌을 준다. 골목 끝에 자리 잡은 교회도 사람들이 주말마다 예배를 위해 모이는 모습을 연상케 하여 정겨움을 더한다.


서울에서는 남의 집 현관을 쳐다볼 일이 거의 없는데 여기는 각 집마다 가진 다양한 색깔이나 디자인의 현관문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다만 부족한 일조량 때문인지 대부분의 집들이 통창으로 되어 있으니 구경하며 걷다가 집주인과 눈 마주치진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어느 여름날의 산책 그리고 뱃놀이를 즐기는 사람들


시가지를 관통하는 운하를 따라 걷다 보면 우리 동네의 랜드마크 타워가 보인다. 모든 건물은 절대 이 타워 이상의 높이로 지어질 수 없다. 어떻게 보면 우리 동네의 아름다운 스카이라인을 만들어낸 주된 역할을 하고 있는 건축물이라 할 수 있겠다.


운하와 타워 그리고 그 주변을 둘러싼 집들은 우리 동네 특유의 아늑하고 정겨운 분위기를 만들어내며 그동안 혼자 이곳에서 살아가는 나를 참 많이 보듬어 주었고 반겨주었다.


아쉽게도 이번 달이 이 곳에서의 마지막 생활이다. 떠나는 것에 대한 후회는 없지만 내가 살던 우리 동네는 참 많이 그리울 것 같다. 한국을 떠나 가장 오래 살았던 나라, 네덜란드.


나를 참 많이 변화시켜주었고 더 나은 나로서 성장하게 해 준 시간들이라 힘들었지만 감사함을 가득 품고 한국으로 귀국을 앞두고 있다.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는 미지수다. 다만 아름다운 추억의 한 챕터를 잘 마무리하는 기분이라 'Bittersweet'하다고 하는 게 가장 맞을 것 같다.


가장 좋아하는 시간대: Golden Hour


4년 전에는 호기심 가득한 채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겨 왔지만 떠날 때만큼은 청명한 여름날의 산책을 나서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가려한다. 집이라 부르고 정을 붙인 이곳을 떠난 다는 것은 입에 담기에도, 생각을 하기에도 너무나 어색하니.


사실 이로서 혼자인 삶은 당분간은, 어쩜 아예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그 어떤 순간에도 나를 잃지 않으며 잘 살아 내보려 한다. 


2021년도 기대가 된다. 조금 더 복작복작하고, 인간답고, 자연스러운 그런 나날들이 펼쳐지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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