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희 Jan 31. 2021

시골 체질

희월헌 입주

네덜란드에서 첫 2년을 Amsterdam(암스테르담)에서 약 한 시간 떨어진 Breukelen (브로퀠렌)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살며 공부를 했다. Breukelen은 읍내라 할 수 있는 시내 중심을 토대로 주변에 큰 집들과 넓은 평야가 주로 자리 잡고 있다. 작은 규모에 비해 부유계층들이 많이 사는 곳이었다. Vecht (벡트)라고 하는 마을을 관통하는 강물 줄기 양 옆으로 거대한 멘션들이 많이 자리 잡고 있었다.


Breukelen 풍경

읍내에서 자전거를 타고 30분가량 달리면 Loosdrechtse Plassen (로스드렉서 플라센)이라고 하는 호수도 나오는데 이 곳은 여름이면 햇빛을 즐기고 물놀이와 뱃놀이를 즐기러 나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이 곳은 내가 네덜란드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장소다. 여름에 호수 옆 모래사장에 앉아 썬텐을 하고 물 멍을 때리면서 공부에 대한 생각을 잠시 완전히 잊곤 했다. 특히, Vecht에 자신들의 요트를 띄우고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들고 항해하는 사람들을 보며 나도 점점 Breukelen의 평화롭고 여유로운 라이프 스타일에 스며들어 간 것 같다.


Loosdrechtse Plassen 풍경


서울의 바쁜 일상 속에서 살던 나에게 이렇듯 자연 가까이 그리고 자연을 즐기며 사는 일상은 디톡스의 시간이었다. 그래서인지 공부를 마친 후에도 나는 망설임 없이 나름 네덜란드 내에서 대도시인 Amsterdam을 뒤로하고 Utrecht (유트렉트) 라고 하는 조금 더 아늑한 도시를 선택하여 이사를 했다. Utrecht는 Breukelen을 품고 있는 도시였다. 주변에 숲과 공원들이 잘 구성이 되어 있었고 아파트를 나서자마자 있는 운하를 따라 자연 가까이에서 산책을 할 수 있는 것이 가장 좋았다. 그렇게 또 네덜란드에서의 후반부 2년은 일을 하며 소도시에서의 삶을 즐겼다.


이렇게 네덜란드에 살면서 내가 시골 체질로 많이 변해가고 있고 화려한 것보다 자연스러운 것이 더 좋아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울에서도 강남보단 성북동이나 삼청동을 좋아했고 한국에 돌아가는 일이 있더라도 꼭 자연과 가까이 살겠다는 다짐을 했다. 도시에서 태어난 사람으로서 도시가 주는 매력도 무한하다는 것을 물론 안다. 다만, 그 도시가 주는 피곤함도 만만치 않은 것은 사실이다. 한국에서 다시 살게 된다면 네덜란드에서의 라이프스타일을 조금이나마 유지하고 싶었다. 시골에서 자연 가까이 사는 삶의 비중을 높이고 도시는 가끔 가서 즐기고 오는 곳으로 바꾼다면 한국에서의 삶도 색다르지 않을까 생각했다.


기약 없이 한국을 떠나 네덜란드에서 혼자 살던 4년을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환향을 했다. 2021년 계속된 코로나 상황 속에서 가장 안전하고 안심하며 생활할 수 있는 곳은 한국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네덜란드를 떠나오는 마음의 준비는 약 1년을 해서인지 마지막 날에도 담담히 공항을 빠져나와 인천행 비행기에 올랐다. 입국 과정은 당연 이전과 같지 않았고 집을 향해 가는 택시 안에서 바라본 풍경도 이전과 같지 않았다. 설레고 좋았다.


중간중간 휴가를 나올 때면 인천공항을 나와 상암동을 거쳐 내부순환로의 교통체증 속에서 양 옆의 답답하게 늘어선 서울의 아파트들을 보며 서울에 왔구나 하며 한 숨부터 지었던 것 같다. 이번은 달랐다. 약 4년 전 내가 네덜란드로 떠날 때 경기도권으로 집을 지어 떠나신 부모님 덕에 이번엔 아파트 대신 설산이 보였고 그 아래로 흐르는 강줄기가 보였고 심지어 맑은 겨울의 하늘도 보였다. 평지의 네덜란드가 주는 평화로움도 있었지만 산과 강이 주는 안정감은 그간 불안한 일상을 보내던 나를 품어주는 듯했다. 아파트가 아닌 낮은 집들이 늘어선 모습들을 보니 또 다른 해외를 간 것 같기도 하고 방역 택시 뒷좌석에서 히쭉히쭉 웃음이 다 났다.


집 가는 길

그렇게 집이 있는 주택 단지에 다다르니 대문 밖에 부모님이 나와계셨고 동네 아주머니들 몇 분도 구경을 나오셨다. 물론 부모님과의 상봉은 눈인사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이랑 온전히 인사 나누고 큰 짐 가방 내리기도 바쁜데 옆집 아주머니께서 담 너머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아주 정신없게 말을 걸어주신다. 그제야 아... 한국에 왔구나 싶었다. 아주머니들 특유의 오지랖과 참견들.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네덜란드에서 살던 터라 처음에는 좀 당황스러웠지만 그래 이게 한국의 정이었지 싶었다. 다음 날 혼자 자가 격리하는 나에게 먹으라고 막국수 한 그릇까지 대문 앞에 놓아주시고 가셨으니. 시골 동네에서나 느낄 수 있는 정이기도 하다. 콩 하나도 나눠먹는 따뜻함. 자가격리 2일차 아침은 대출언니의 전화로 깼다. 이 역시 약간의 시차증을 겪고 있던 나에게 다시 한번 한국에 왔음을 확인시켜주는 알람이 되었다.


자가격리 2주간은 혼자 지내며 집에 적응을 해보고 있다. 아침, 저녁으로는 마당에 나가 동네 새들의 먹이를 챙겨주고 잠시 앉아 설산을 보고 햇살을 맞으며 멍을 때리고. 눈이 온 날은 마당의 눈도 쓸고 치우고. 생각보다 할 일이 많고 가만히 있어도 편안하고 좋다. 부모님은 집에 이름을 지어주셨는데 희월헌이라 지으셨다. 기쁜 달이 걸린 집이라나. 2주가 지난 후에 시작될 시골 라이프도 기대가 된다. 네덜란드에서 결심한 대로 이 곳에 정착하여 새로운 일상과 활동들을 만들어나가기로 했다. 조금 더 자연에 가깝고 나를 편안하게 하는 방향으로 앞으로 모든 선택을 집중시켜볼 예정이다.


박새의 방문


매거진의 이전글 여름날의 산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