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희 Feb 09. 2021

아침 루틴

새 집사

네덜란드에서 돌아온 후 희월헌에서의 자가격리 해제가 D - 2로 다가왔다. 그 사이 눈도 두 번이나 15cm 가까이 왔다. 그럴 때면 동네 주민들이 일찍이 나와 눈을 쓰는 소리에 눈이 떠져 나도 바로 마당으로 나갔다. 대문을 열고 나가 도로 치우는 것을 도와드릴 순 없었지만 마당을 쓸고 계신 주변 이웃분들과 인사도 하며 나도 삽을 집어 들었다.

눈 열심히 치우는 중

사실 눈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는다. 어릴 때 빙판길에서 하도 많이 꽈당해서 눈이 오면 걱정부터 앞선다. 이번에 마당에 쌓인 눈은 왠지 반갑다. 안 그래도 움직임이 적은 요즘 걸어 다닐 구실을 만들어 주는 듯하다. 게다가 15cm가량 쌓인 눈은 꽤나 무겁다. 마당을 밀고 쓸고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눈을 퍼 올리다 보니 한겨울에도 땀이 줄줄 나고 있다. 덕분에 아침 운동 제대로 하고 따끈한 커피 한잔으로 몸을 녹이며 아침을 열었다.


아침에 절대 빼먹으면 안 되는 일과가 하나 더 있다. 내 아침밥보다 더 먼저 챙기는 새들 아침밥. 희월헌에는 다양한 새들이 놀러 온다. 박새 4마리, 곤줄박이 1-2마리, 직박구리 2마리, 오목눈이 한 무더기. 박새와 곤줄박이는 아몬드를 먹고 오목눈이는 쌀을 먹는다. 박새들은 아침에 문 열고 나가는 소리만 들리면 이미 담장이나 나무에 앉아서 짹거리면서 쳐다보고 있다. 겁이 많아서 절대 사람 곁에 오진 않는다. 자리를 비켜주고 나면 넥타이를 맨 듯이 목부터 배에 이르는 검은 줄이 있는 아빠 박새가 먼저 내려와서 아몬드를 집어 나무로 올라가고 나머지 식구들이 와서 먹기 시작한다. 이렇듯 박새 가족들이 가능하면 빠르게 와서 아몬드를 먹기 시작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박새 페밀리 등장

새 박사는 아니라 자세한 생태계는 모르겠지만 곤줄박이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박새들은 주춤주춤 한다. 곤줄박이가 와서 먹기 시작하면 박새들은 곤줄박이가 다른 나무로 올라간 후에야 아몬드를 집어간다. 덩치도 비슷한 것들이 밥그릇 놓고 싸우는 거 보면 자연에서 살아남는 건 더 치열하구나 싶다. 하지만 그 밥그릇 싸움마저 쭈그리고 앉아서 멍 때리고 구경하다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인 나에게는 힐링 타이밍이다.


나름 싸움을 말리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으로 아몬드를 내 손바닥에 올려 곤줄박이에게 내밀어보았다. 곤줄박이는 사람한테 오기도 한다는 얘길 들었던 터라 정말 올까? 싶었다. 쭈그린 자세를 유지한 채 곤줄박이의 눈높이에 맞게 팔을 뻗자 요놈이 눈치를 살피더니 날아왔다! 처음에는 퍼드득퍼드득 대면서 손에 앉지는 못하고 아몬드만 가져가더니 두 번째는 더 용기가 생겼는지 네 번째 손가락에 살포시 앉았다. 그 느낌은 마치 얇은 철사를 손가락에 끼우는 듯했다. 그 후로 요놈은 더 이상 퍼드득 대지 않고 와서 앉아서 나를 한번 쳐다보고 아몬드를 집어가고 교감이 나날이 늘어가는 중이다. 예뻐 죽겠다.

     

곤줄박이 내 손가락으로 날아 오를 준비중


자가격리를 하면 담당공무원만 연락을 하실 줄 알았는데 관할 보건소 정신과 선생님도 전화를 주신다. 괜찮은지, 힘들진 않은지. 차마 새들과 노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말씀을 드리진 않았지만 네덜란드에서 불안해서 밖에도 나가지 않고 지내던 날들에 비해서 지금 정말 좋다고 말씀드렸다. 안심이 되고, 마음도 안정되고, 잘 쉬고 있다고. 내 마음이 정말 한결 편안해진 게 느껴진다. 집에 와서도 그렇겠지만 자연이 주는 이런 작은 선물들도 불안한 것들을 잠시나마 다 잊게 하는 힘이 있다.


오후 4시면 새들이 또 저녁 달라고 오는 시간이다. 점점 새 집사가 되어가는 내 모습이 퍽이나 마음에 든다.


  

저녁밥 줘유 (2층에서 사람 구경 중인 곤줄박이)




매거진의 이전글 시골 체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