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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순 Feb 10. 2024

글은 기억을 머금은 물

갑자기 쏟아진 기억에 흠뻑 젖어버리다

어떤 음악을 듣거나 향기를 맡았을 때, 그 멜로디와 감각에 숨어있던 기억이 확 되살아난 경험은 다들 있을 것이다. 음악은 현존하는 타임머신이라는 문장도 어디선가 본 것 같다. 그래서 종종 어떤 순간을 오래 기억하고 싶으면, 나는 그 순간을 담을 그릇으로 노래 하나를 선택해서 반복해서 듣곤 했다.


예를 들어, 2020년 코로나로 인해 대학가 근처에 학생이 없었을 때 자취를 하던 나는 장미가 가득 핀 교정을 혼자 걸어 다니곤 했다. 그 쓸쓸하지만 화려하고 향기로운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서, 전미도가 부른 '사랑하게 될 줄 알았어'라는 노래를 반복해서 들으며 그 길을 걸었다. 지금까지도 문득 그 노래를 듣게 되면 한적하고 쓸쓸했던 그 장미꽃길이 떠오른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는 사실, 글이 가지고 있는 기억의 속성에 대해 말하고 싶어서 쓴다. 음악, 또는 향기가 기억을 담는 그릇이라면 글은 기억을 머금은 물이 아닐까. 그릇은 기억을 오롯이 담은 채 기다린다면, 글은 엎질러진 형태로 존재한다. 완전히 엎질러진 채 시간이 흐르면 아예 증발되었다가 나중에 찾아 읽을 즈음 비가 되어 확 쏟아져 버린다. 마치 글을 쓰던 그 당시의 나로 돌려 놓을 것처럼 축축하게 적셔버린다.


글을 써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내가 쓴 글이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내가 이런 글을 썼었나?' 싶게 망각된다는 사실을. 4년이 넘는 시간 동안 브런치에 접속하지 않은 나도 그런 경험을 했다. 다만 다시 긴 글로 내 일상을 기록해볼까 싶어서 브런치로 돌아온 시점이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라는 것, 그리고 브런치에 첫 번째로 써뒀던 글이 외할머니와의 추억을 기록해 뒀던 글이라는 것이 내게는 운명 같았다.


'내가 이런 글을 썼었구나.'


그 글에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노인의 모습이었던 외할머니를 이해해 가는 나의 소회가 적혀있었다. 아흔여섯이었던 외할머니는 그로부터 4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치매에 걸리셨다. 일상이 바쁘다는 핑계로 외할머니를 못 찾아뵌 지 몇 달이 되었을 때, 외할머니는 기약도 없이 훌쩍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언제 돌아가셔도 이상할 것이 없던 연세라고들 했지만, 왠지 나는 외할머니가 따뜻한 봄날에 주무시듯이 평화롭게 돌아가실 거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추운 겨울날 갑작스럽게 떠날 거라고는 상상하지 않았던 것이다. 모두가 호상이라고 말하며 북적이던 장례식장에서도 누구도 사인에 대해 묻지 않고 참 복이 많은 분이었다고 입 모아 말했지만, '언제 돌아가셔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말을 자꾸 되뇌게 되었다. 그러니까, 죽음은 늘 남겨진 자들의 몫이었다. 떠난 사람은 아무런 미련도 남기지 않는다. 아쉬운 쪽은 늘 남겨진 사람들이었다.


내가 아흔여섯의 한 노인을 이해하게 될 때,
세상에 놓인 아파트 화단의 커다란 돌과 막 떠오른 커다랗고 하얀 달,
그리고 그 여름의 식탁이 모두 소중하고 애틋해졌다.

https://brunch.co.kr/@deulsoonh/1


왜 나는 지난달에 갑자기 브런치에 접속하고 싶어 졌던 걸까. 지난 글에 '인스타그램을 삭제했기 때문'이라고 적었지만, 나는 어쩐지 우리 외할머니가 내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떠난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훌쩍 떠난 외할머니의 자리를 아쉬워하고, 어쩌면 죄책감까지도 느끼고 있는 손녀에게 '우리 이런 기억을 함께 공유했잖니. 괜찮단다.'하고 이야기하고 떠나신 것 같은 느낌.


잊고 있던 기억 속에 흠뻑 젖은 채, 그저 신기하다고만 생각하게 되었다. 글은 기억을 머금은 물이구나. 완전히 증발되고 나서도 내 주변을 맴돌다가 언젠가 찾아 읽게 되는 순간 비처럼 솨 쏟아져버리고 마는 기억이구나. 며칠 동안 나는 이 우연에 대해서 계속 생각했다. 지난날의 내 기억과, 그 기억을 머금은 글과, 시간의 흐름과 망각, 그리고 죽음과 남겨짐. 앞으로 삶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에 대한 숙제가 생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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