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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서 Jun 18. 2020

영화 <밀양>과 원작 소설 「벌레 이야기」비교 감상하기

<밀양>과 「벌레 이야기」 비교 감상문

                 

                 

벌레이야기 (1985)           밀양 (Secret Sunshine, 2007)




  <밀양>은 「벌레 이야기」를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밀양>을 먼저 감상한 뒤「벌레 이야기」를 읽었는데 그러다 보니 눈에 먼저 들어온 건 바로 시점의 차이였다. <밀양>은 남편을 잃고 아들과 단둘이 밀양으로 오게 된 신애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주인공의 감정 상태에 대한 독백은 없지만, 영화라는 매체 특성상 관중은 배우의 연기를 통해 신애라는 인물의 상황과 감정에 몰입하게 된다.


  「벌레 이야기」는 남편이 아내를 관찰하는 시점으로 소설이 전개된다. 이 소설은 아들을 잃은 알암 엄마의 심경 변화가 이야기의 흐름에 큰 영향을 끼치는데, 김 집사는 물론이고, 남편 또한 알암 엄마의 심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그나마 남편이 같은 가족 구성원으로서 알암 엄마의 심리를 어느 정도 유추하지만, 알암 엄마는 깊이 모를 슬픔과 절망, 분노, 복수심에 사로잡혀 있으므로 그것이 완벽하지는 않다.


  이로 보아 종교를 통한 구원의 손길을 내민 김 집사와 가족이란 연으로 맺어진 남편일지라도 그들은 알암 엄마에게 절대적인 타인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자신을 위하거나 가까운 사이일지언정 정녕 자기 자신이 아닌 이상 그 고통의 깊이는 함부로 가늠할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을「벌레 이야기」는 알암 엄마의 남편을 관찰자로 차용함으로써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이어서 「벌레 이야기」와 <밀양>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신애와 알암 엄마가 구원받느냐 받지 못하느냐의 문제 같다. 「벌레 이야기」에서 알암 엄마는 누구에게도 구원받지 못한다.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조차 살아갈 이유 한 틈 낼 자리가 없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반면에 알암 엄마와 같은 종교를 믿은 범죄자 주산학원 사장은 주님으로 인해 구원받았다며 장기 기증까지 약속하고서 편안한 마음으로 사형에 오른다.


  

  그렇다면 「벌레 이야기」는 죄 없는 알암 엄마는 구원받지 못했으나 범인 주산학원 사장은 구원받는, 권선징악이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의 모순을 보여주고자 한 것일까. 그렇다고 보기엔 주산 학원 사장도 구원받지 못한 자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가 종교로 인해서든 개인적인 고찰을 통해서든 진정한 깨달음을 얻었다면 알암 엄마 앞에서 절대 편안한 표정도 목소리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진정으로 구원받은 존재였다면 알암 엄마 앞에서 가장 먼저 보여야 했던 것은 눈물이다. 하지만 알암 엄마가 얘기했던 것처럼 그는 알암 엄마의 용서가 있기도 전에 모든 것을 초월한 듯한 평화로움을 얻었고 이는 명백한 기만이며 억지로 얻은 자기 위안일 뿐이다. 즉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자기 구원의 상대성과 모순성이라고 추측한다. 진실한 구원을 위해 헤매었던 자가 있었고 그저 이기적인 안식처일 뿐인 구원에 기대어 마음 편히 누워 있는 자가 있었으나 다치고 깨지는 건 결국 전자인 것처럼 말이다.


  반대로 <밀양>의 신애는 알암 엄마와 같은 주인공이지만 맞이하는 결말은 사뭇 다르다. 신애는 알암 엄마와 마찬가지로 아들을 잃고서 슬픔을 못 이겨 미친 것처럼 보이는 면모마저 보인다. <밀양>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고 생각하는데 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신애를 보여주는 장면까지는 단순히 개인의 절망에 대해서 나타내고 있고, 신애가 종교를 믿고 난 이후의 장면은 개인의 구원에 대해서 나타내고 있다. 신애는 종교를 받아들임으로써 진정으로 구원받은 듯 보였으나, 알암 엄마와 같이 범인 면회를 다녀온 이후 돌연 기절해버린다. 이렇게 신애의 상태가 점점 호전되는 듯했지만, 자신이 용서하기도 전에 용서받아버린 범인으로 인해 전부 허사가 되어버린다.


  

  그 이후로 신애는 한때 믿었던 주님이 보란 듯이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행동을 서슴없이 저지른다. 물건을 훔치고 이웃의 남편과 불륜을 저지르는 등의 행위는 신애의 주님에 대한 반항이자 거부다. 만약 당신이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면 이런 나를 보고서도 견딜 수 있겠느냐 싶은 반항심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주가 있을지도 모르는 하늘 아래서 이웃과 불륜을 저지르며 하늘을 바라보며 웃는 모습은 주에 대한 조롱처럼 보인다. 또는 이런 일련의 행위들이 아들 준이를 구원하지 못했다면 당신의 전지전능함으로 이런 나라도 구원해보란 소리 없는 절규인 것 같기도 하다.


  이처럼 알암 엄마와 같이 지옥을 헤맨 신애였지만 결말의 차이는 신애가 정신 병원을 나온 후, 머리카락을 자르는 모습에서 이루어진다. 신애는 정아가 일하는 미용실에서 머리카락을 자르다 갑작스레 뛰쳐나와 집으로 향한다. 마당에 들어선 신애는 의자를 내고, 얼굴만 한 거울을 세우고, 한 손엔 가위를, 한 손엔 머리카락을 쥐고서 직접 머리카락을 자르기 시작한다. 홀로 해보고자 하는 시도와는 달리 이미 가위와 머리카락을 쥔 양손으로는 거울의 위치를 조정할 수 없었기에 신애는 거울을 곁눈질하며 쉽사리 가위를 움직이지 못한다. 그때 마침 신애를 따라 뛰어 들어온 종찬은 신애가 머리카락을 자를 수 있도록 기꺼이 거울을 들어준다.



  구원이란 얼마나 상대적인가. 사람 한 명을 구원하기 위해 짊어져야 할 무게는 예수가 진 십자가만큼이나 거창하지 않다. 딱 거울 하나만큼의 무게, 그것이면 살아야 할 이유를 잃은 인간의 피폐한 마음 한편에도 햇볕이 드리운다. 약국 주인은 햇빛 한줌에도 주님의 뜻이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신애의 집 마당을 비추는 햇빛은 어떤가. 신애가 자른 머리카락은 잔잔한 바람이 불어 물이 고인 그늘진 흙탕으로 섞인다. 이 모습은 어쩐지 쓸쓸하지도 암울하지도 않다. 그 이유는 햇빛이 있기 때문이다. 종교가 내린 구원에는 해가 내리쬐어 밝은 면도 있지만, 필연적으로 그늘이 지기 마련이다. 그와 반대로 신애의 집 마당은 그늘이 진다면 햇빛도 반드시 존재한단 사실을 품고 있는 것 같다. 아들을 잃고 바닥없는 절망 속으로 한없이 가라앉고 있었으나 거울 하나 들어줄 종찬이 신애에게 있는 것처럼 말이다. 혼자 일어서려고 할 때 거울 하나쯤은 언제든 맡겨도 될 종찬이 있기에 신애는 괴로운 기억 한 뼘을 가위로 잘라 끊을 수 있었다. 교회 사람들은 신애를 신도로 보았기에 종교가 없는 신애는 신애가 아니었지만, 종찬은 신애를 규정짓지 않은 한 사람으로 보았기에 신애는 오후의 햇빛을 따사로이 맞는다. 비밀스러운 빛, 밀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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