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을 넘으면 또 지평선이 펼쳐지는 몽골의 초원을 7시간 달리다 무심코 빌었던 세 개의 소원을 생각한다. 지금 내 마음은 어디에 있고, 또 어디에 있지 못한지.
방구석 여행만 즐기며 한 번도 가보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곳. 어릴 적 읽은 책에 무서운 민족이 살고 있다고만 들었던 곳. 여권을 쥐고 밤 비행기에 너덜해진 몸을 맡겼다. 쌀쌀하다는 첫인상과 함께 조금 달리다 만난 오보(Ovoo, Files of Stone) 앞에서 세 바퀴를 돌며 세 개의 소원을 빌었다. 새해 일출 보러 갈 때도 소원을 빌 때면 급조를 하는데, 갑자기 소원을 빌자니 식상한 말들만 나왔다. 별다른 소망도 없이 사는 내 모습에 잠깐 웃었는데 , 옆 자리 K는 춥고 졸려서 아무 생각 안 했다며 눈 붙이기 급급했다.
여기는 몽골이구나. 시작부터 마주친 몽골 신화에 비로소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게 실감 났다.
넓다는 말로는 도저히 담을 수 없는 자연을 두고 내 사소한 생각을 얹어 보려 했건만, 그런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바람에 말똥 냄새가 실려왔다. 일행과 시시덕거리며 들판을 거닐다 정신을 차려 보니 사방에 아무도 없었다. 덜컥 겁이 나 ‘어느 길로 가야 하지 ‘라고 뱉었다가 길이 없는데 길을 찾고 있는 내 관성을 느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디로 가도 되는 곳. 가면 안 되는 길이란 없는 곳. 어디로 가야 하냐는 질문이 무안한 곳. 거기서 잠깐 멈춰 있었다.
바람소리, 내 발소리, 새소리, 물소리, 말소리가 들려왔다.
하루는 모래 언덕을 오르기로 했다. ‘올라갈 수 있겠어?’ 질문에 콧방귀 뀌며 자만했는데 웬걸. 오랜만에 네 발로 기었다. 나보다 앞서갈 친구, 나보다 뒤에 있을 것 같은 친구. 모두 나를 지나쳐 가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남을 보며 더 빨리 가지도 말고, 남을 보고 더 느리게 가지도 말자고. 자꾸 앞서거니 뒤서가니 생각하지 말자. 부르는 소리도 듣지 않고 내 발걸음에만 집중하니 곧 사막 한 가운데 언덕 위에 올랐다. 보이지도 않는 곳까지 언덕은 이어졌다.
첫날부터 느꼈지만 몽골엔 별이 참 잘 보인다. 별이 쏟아진다고 느꼈던 강원도 한 여행지는 비할 바가 못 됐다. 북극성이 선명히 보이고 별똥별이 수시로 떨어지는 하늘, 간사하게도 며칠이 지나니 그다지 감격스럽지 않았다. (그래도 다시 간다면 별 때문이다.)
마지막 날 밤, 미친 사람처럼 별을 보다가도 또 억지로 별을 보고 있어야 하나 하는, 늘 나를 괴롭히는 반발심에 웃겨서 한 번, 갑자기 벅차서 한 번, 대상도 없는 곳에 미안해서 한 번 울었다. 자연을 벗 삼은 사람들은 지혜로울 수밖에 없다는 말이 논리 아닌 마음으로 느껴질 때 마지막이라는 고집을 포기할 수 있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당연히 붙잡는 것들, 이라고 메모장에 썼다가 또 저울질하는 마음에 됐다, 싶어 쥐 나오는 게르에 들어가 푹 잤다.
다시 한국이다. 몽골 감상에 마침표가 찍히지 않다가 ‘기분 좋은 금요일이잖아요.’ 흘려들은 말에 정신이 돌아온다. 정자 밑에서 독서하다 낮잠, 빌딩 숲에서 다행히 건넌 횡단보도.
참 그 얘기를 하려던 게 아닌데, 첫날 빌었던 세 개의 소원 중 두 번째 소원이 도저히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지 않는 두 번째 소원만 이루어지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