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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일 Dec 27. 2022

산책 끝엔

아무 생각 안 하며 지냈다. 가도, 하다 만 것들을 떠올리곤 한다.


하다 만 것들에 대한 내 목록은 길다.

잘하려고 미뤘던 일들, 언젠가 내 보려던 작품들, 일기들, 생각들, 운동들, 약속들, 연락들, 3년 전 임용고사, 2년 전 취업 준비, 10년 전의 선택들.




그림을 다시 그린다.

세 시간 레슨 내내 내 그림에 아무 말이 없어서 속으로 차라리 혼이라도 냈으면 하고 조바심했다.

끝나갈 때쯤, 승일 씨는 너무 잘 그리려고 하는 것 같다며.

진한 선이 많다고, 덧칠한다고, 재미는 있으신가요….



천천히…




K와 얼마 전 전화했다.

작년 가을쯤 집 근처 횟집에서 만나 같이 했던 얘기, 소설 한 편 써 보겠다며.

최근 근황은 이번 달 말까지만 회사를 다닌다고.

일부러 안 꺼낸 소설 얘기 대신 다음 달 같이 갈 바다 얘길 했다.


하다 만 것들, 잘하려다 미뤄 버린 것들, 좋아하는 것들.

산더미처럼 쌓인 그것들 제일 안쪽엔 뭐가 있을까.

사진들, 폴더들, 물건들, 책들, 휴대전화 바탕화면엔….

K도 나도, 잘 보이지 않는 선 위에 계속 덧칠한다.





8월부터 지금까지 거의 매일 산책한다.

산책을 하면서는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이렇게 결정할 수 있는 거면, 처음부터 고민도 않았지, 라는.

그렇게 흐릿한 산책길에서 네 달을 보냈다.


오늘도 산책하는데 S에게서 연락이 왔다.

더 산책하려고 횡단보도를 중간쯤 건너다 뒤돌아 뛰었다.

10초, 9초, 8초, ….

다시 뒤로 막 뛰었다.

내가 걸었던 산책길을 거꾸로 헤아리며 다시 뛰었다.




오늘 하다 만 산책길엔 그동안 했던 산책길이 모두 있었다.

그리고 결정도, 사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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