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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소방관 Aug 23. 2021

[소방관이 읽은 시] 약한 생명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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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도 겨울이
어둡고 쓸쓸한 까닭은
이슬, 꽃, 나비……
이렇게 작은 생명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랍니다     


그들이 우리 곁에
소리 없이 날며 반짝거릴 때
온 누리는 매일매일
명절처럼 풍성했지요


옥수수밭엔 풍뎅이가,
나뭇가지엔 거미줄이,
언덕에는 제비꽃이,


이 세상이 참으로
아름답게 되려면
그처럼 약한 생명들이
한껏 빛을
발할 수 있어야 한답니다


새봄이 그렇게도
곱고 포근한 까닭은
이슬, 꽃, 나비……
그토록 조그마한 생명들이
우리 곁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랍니다.


<이 화려한 침묵> 정숙자, 명문당, 1993


걷기를 좋아합니다. 새벽잠이 없어 동틀 녘에 주섬주섬 집을 나섭니다. 그리고 동네 앞 하천 산책길 따라 한참을 걷습니다. 궂은날만 아니면 어김없이 나가곤 하는데 걷는 기분도 기분이지만 눈과 귀도 즐거운 시간입니다. 길가의 잘 정돈된 꽃과 나무들이 눈에 들어오고, 좔좔 흐르는 냇가의 물소리가 시원하게 들립니다. 불어오는 바람은 얼마나 청량한지 모르고요, 떠오르는 해에서 서서히 비춰 오는 햇살의 따스함도 눈부십니다. 

    

걷는 동안 주변의 것들을 보자면 더 신비롭습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여름이니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한껏 생생하게 느껴질 때입니다. 사람만 숨 쉬는 게 아님을 느낍니다. 모든 생명체들이 빛을 머금고 물을 마시며 깊은 호흡을 한다는 것이 눈에 다 보일 정도입니다. 과연 길을 걷지 않았다면 이 세상에서 과연 나 말고 살아있는 것들이 있는지 알았을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이렇게도 겨울이
어둡고 쓸쓸한 까닭은
이슬, 꽃, 나비……
이렇게 작은 생명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랍니다     


굳이 계절이 달라지지 않아도 요즘은 쓸쓸함을 자주 느낍니다. 온통 화려하고 번쩍이는 도시의 불빛은 이슬, 꽃, 나비가 주는 생명의 느낌과는 비교할 거리도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겨울이 되어 이런 작은 생명들이 사라지고 없다면 더 그렇겠지만 굳이 겨울이 아니더라도 북적이는 회색빛의 도심 한복판은 겨울의 쓸쓸함만 겨우 남아 있는 듯합니다. 작은 생명 하나 발들이기 버거운 세상처럼 보여 더 그렇습니다. 

    

이런 대도시의 환경에서 살아가는 동안 과연 우린 얼마나 작은 생명이 주는 경이로움을 알고 살아갈까요? 

    

옥수수밭엔 풍뎅이가,
나뭇가지엔 거미줄이,
언덕에는 제비꽃이,     


왜냐면 이곳에는 옥수수밭의 풍뎅이도 나뭇가지의 거미줄도 언덕 위의 제비꽃도 보기가 어지간해서는 힘들기 때문입니다. 집을 나서면 메케한 연기에 누런 미세먼지만 가득합니다. 거기에 몹쓸 병균이 온 세상을 휘감아 버렸네요. 내 몸에 들어올까 입이며 코를 꽁꽁 가리고 다니니 작은 숨조차 쉬기가 버겁습니다. 이렇듯 사람 살기도 힘든 환경이니 풍뎅이나 거미가, 언덕 위의 제비꽃이 살아내기 만무합니다.  

    

어릴 적 살았던 고향 마을 같지는 않더라도 내 사는 곳 주변에도 나 말고 살아있는 것들이 많아야 할 텐데 라고 느끼는 것은 저뿐인가요? 꼬물거리는 개미가 보도 블록 사이를 비집고 나와 줄 맞춰 걸어가는 게 보이면 여간 반갑지 않거나, 저녁 무렵 열린 창가로 귀뚜라미 소리라도 들리지 않을까 숨죽여 기다려보는 게 이상한 행동일까요?     


이 세상이 참으로
아름답게 되려면
그처럼 약한 생명들이
한껏 빛을
발할 수 있어야 한답니다     


이 세상은 사람만 살아서는 안될 곳입니다. 인간 이래 봤자 거대한 대자연 중 티끌만 한 존재도 안됩니다. 저는 분명히 그것을 압니다. 직접 느끼고 보았습니다. 스쿠버 다이빙을 십 수년째 즐기고 있기에 깊숙한 바닷속에 가끔 몸을 던져 넣습니다. 숨 한 모금 조차 스스로 쉴 수 없는 시커먼 물속에 들어갈 때 오싹한 두려움은 잠시, 형형색색의 수중 생물의 군락을 눈으로 보게 되면 신비로움과 함께 경이로운 마음마저 듭니다.     


허나 그곳은 인간의 영역이 아닙니다. 기껏 해봐야 삼십 여분 그것도 기계 장비의 힘을 빌어 구경하고 나올 뿐입니다. 물속에서 인간은 숨 쉴 수 없는 나약한 ‘작은 생명’ 일뿐입니다. 만물의 영장이면 뭐합니까? 작디작은 흰동가리 한 마리 조차 쫓아가기도 버거운 존재인걸요. 그렇게 다시 뭍으로 나와 가만히 생각해봅니다. 지구의 70%가 물인데 그것 빼고 기껏 남은 땅이 다 제 것인 양 말하고 행동하는 인간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지금 발 닿는 곳 역시 인간의 모든 영역이 아닙니다. 험하디 험한 히말라야 산맥에 있는 에델바이스는 그 춥고 험한 곳에서 살아가는 생명입니다. 어찌 인간이 히말라야 에델바이스 보다 강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흰동가리보다 인간이 위대한 생명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사는 이 땅, 어쩌면 같이 살아가거나 아니면 빌려 쓰는 정도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마치 다 원래 인간의 것인 양 여깁니다. 함께 숨 쉬고 있는 이슬이며 꽃이며 나비를 하찮게 여기지는 않는지 잘 살펴봐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를 귀하게 여기지 못하고 보이는 대로 깨고 부수는 인간의 오만함을 뒤 돌아봐야 합니다. 결국, 시가 말하듯 약한 생명들이 한껏 빛을 발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인간 말고 다른 것도 마음껏 숨 쉴 수 있을 때 봄도 알고 여름도 알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무려 30여 년 전에 지어진 시입니다. 시인은 지금의 시대를 예견했을까요? 시인이 말하는 약한 생명들이 더 살기 힘들어졌음을 슬퍼하지는 않을까 읽는 내내 면구스러웠습니다. 시가 쓰인 때는 제가 중학교 3학년 때쯤인 것 같습니다. 그땐... 네 맞습니다. 내가 살던 고향마을엔 작고 약한 생명들 천지였습니다. 반딧불이, 방아깨비, 도롱뇽, 청개구리... 그리고 우린 그런 생명은 귀한 거라 배우며 자랐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생각해보건대 숨 쉬고 움직이는 생명에 대한 존귀함이 예전만 못한 것은 분명한 듯합니다.  

    

세상의 모든 생명은 움텄다가 사라지는 성스러운 생의 순환 현상을 가집니다. 우리는 그것을 소중하게 느끼고 자연 그대로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계절도 우리에게 왔다 가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그런 계절은 살아 있는 모든 생명과 함께 공유해야 하고요. 그래야 봄의 따스함이 얼마나 귀한 지, 여름의 화려함이 얼마나 즐거운지, 가을의 풍요로움이 얼마나 복된지, 겨울의 고요함이 얼마나 신비로운지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걷듯이 천천히 바라보고, 앉듯이 낮게 들여다봐야 할 일입니다.

     

약하고 작은 생명이 더 이상 없다면 곧 모든 것이 숨 쉴 수 없을 겁니다. 어쩌면 인간이 가장 약하고 작은 생명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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