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악설에 손을 들 수밖에 없는 이유
미드 <워킹데드>를 보며 든 생각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퍼진다. 이 바이러스 보균자는 인류의 모든 인간이다.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도 모를 바이러스는 인류를 공포로 몰아넣고 순식간에 파괴한다. 죽은 자는 되살아나 걸어 다니며 '워커'로 불린다. 워커에게 물리면 고열에 시달리다 죽고 같은 워커가 된다. 물리지 않고 죽더라도 워커가 된다. 드라마 '워킹데드' 이야기다. 드라마 속에서는 좀비가 되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처절한 투쟁이 그려진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좀비 외에 또 다른 적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이다. 어째서 이 아비규환의 세상 속에 인간은 또 다른 적이 되는 것일까?
공포스러운 세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서로 뭉치게 된다. 그러나 살아남은 이들끼리 연합해 좀비에 대항하고 해결책을 찾아도 모자랄 판에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눈다. 그룹의 생존을 위해 다른 그룹의 물건을 약탈하고 살인을 저지르거나 희생양으로 사용하는 일도 부지기수다. 인간의 본성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이기심과 탐욕이 판을 친다.
이는 정유정의 소설 <28>에서도 확인된다. 인수공통전염병이 퍼진 화양이란 가상 도시는 죽음의 도시가 되고 법과 질서는 무너진다.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도시를 탈출하려 하고, 군부대는 나라 전체가 바이러스의 공포에 시달릴 것을 우려해 시의 경계를 넘고자 하는 이들을 즉각 사살한다. 화양은 철저히 고립되지만, 뉴스는 이를 보도하지 않고, 화양의 일은 그대로 묻히고 도시에 갇힌 사람들은 죽어간다. 공포가 극에 달할수록 인간의 본성은 사라진다. 꼬리 칸과 머리 칸으로 철저히 구분하던 <설국열차>의 세계는 어떤가. 대체 누가 꼬리 칸을 규정하고 머리 칸을 규정짓는단 말인가. 어째서 꼬리 칸 사람들은 노예와 진배없는 삶을 살아야 하는가.
드라마를 보다 문득 인간 세상을 지탱하는 것은 무엇일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은 위태위태한 선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만일 <워킹데드>, <28>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여지없이 선이 무너지고 도시는 공포로 물들고 사람은 서로를 죽이고 살아남기 위한 서바이벌 게임이 펼쳐지고야 마는 것일까? 이쯤 되면 인간은 원래 악한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악한 본성은 법과 제도, 사회규범이라는 선에 의해 억눌리고 유지되지만 그 선이 끊어졌을 때의 혼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한편, 아포칼립스를 소재로 한 영화나 소설에는 늘 무리를 이끄는 리더가 등장한다. 그룹의 성격은 리더에 따라 좌지우지된다. 리더가 악하다면 그룹은 자연스럽게 악한 행위도 서슴지 않는다. 리더가 선하다면 그 그룹도 선하다. 사람들은 위기가 닥칠 때마다 스스로 나서 무언가를 하기보다 리더에게 의존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리더는 지도자로서의 위엄을 보여야만 존중받을 수 있다. 그러나 다른 그룹을 이끄는 리더와 만난다면 반드시 자신이 더 강하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그래야만 사람들은 자신을 따른다. 공포가 짓누르는 아포칼립스 세계 속에서도 서열이 존재하고 서로의 영역에서 더 뛰어난 지도자로 평가되어야만 한다. 연합은 불가능하다. 물론, 영화나 소설 속 이야기지만 현실세계 속에서 그와 같은 일이 닥친다면 똑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아포칼립스 세계 속에서 동등한 관계로 역경을 헤쳐나가는 것은 왜 그리 어려운 일이 되는 걸까.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살아남기 위해 더 조심해야 하고 경계해야 할 것은 좀비가 아니라 인간이란 사실 말이다. 동물의 영역 다툼과 인간의 영역 다툼은 딱히 다를 바가 없다. 인간이 지닌 지성은 아포칼립스 세상 속에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약육강식의 세상이 된다. 인간은 원래 악한가? 사회라는 틀이 악의 본성을 억누르고 있는 것일까? 악한 일을 저지르는 이들은 마침내 억누른 본성이 터져 나와 활보하는 것일까? 그래서 이 세계는 끝없는 분쟁과 갈등에서 벗어날 수 없고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일까.
좀비가 세상을 지배해도 인간 세상의 갈등은 끝나지 않는다. 리더의 말에 복종하는 방조와 방관은 또 다른 악인을 가득 만들어낸다. 만일 인간들이 하나로 연합해 좀비와 대항하고 정체불명의 바이러스와 대적한다면, 희생을 최소화하고 대책을 찾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열이 이어지고,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냥할 뿐이다. 공멸의 길인 셈이다. 만일 한 명의 지도자를 따르기보다 서로 연합하고 합심해 평화적으로 이끌어나간다면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지만,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사회는 지나치게 누군가를 따르는 시스템에 익숙해져 있고, 좀비 아포칼립스 속에서 공포심은 누군가에게 의존하게 만든다. 결국 그룹은 다른 그룹을 배척하고 그룹 간의 전쟁도 불사한다.
사실 아포칼립스 세상과 현실세계는 그다지 다를 바가 없다. 우리 역시 다른 그룹을 배척하고 오직 자신의 그룹만을 위한다. 또 아무렇지 않게 그룹의 리더를 따르고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인간이 원래부터 선한지 악한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지나치게 누군가를 따르는데 익숙한 사회 시스템은 언제나 악인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인터넷 속 마녀사냥은 동조에 의해 그 수위도 갈수록 높아지며 위엄을 드러낸다. 그러나 선량한 사람이 마녀사냥의 희생양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 행위를 반성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동조는 또 다른 악을 만들어 낸다.
어쩌면 악은 선택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수에 의해 그것이 정의라 믿는 이념과 신념에 의해. 무엇보다 타인의 말에 휘둘려 판단을 잃은 우리 자신으로부터. 아포칼립스 세상 속에서도 연합할 수 없다면 인간 세계의 갈등은 영원히 지속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