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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여 Aug 28. 2023

중년소년의 잠깐 트레블로그

11. Burgos -  Castrojeriz

순례길 DAY 11. Burgos - Hornillios del Camino 

작고 아름다운 도시 부르고스를 지나니 메세타고원을 본격적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높게 솟은 평탄한 땅이 끝없이 펼쳐진 풍경은 장관이었다. 가끔 땅이 움푹 들어가 물이나 강이 흐를 것 같은 곳에는 어김없이 마을이 있었다. 우리는 그 마을들을 연결해 주는 자갈길을 걸었다. 우리는 앞으로 평균 600미터 이상의 고도를 8일 정도 걷게 될 예정이었다. 메세타의 땅은 가벼운 바람에 잔잔히 출렁거리는 초록바다 같았다. 이름을 알 수 없는 풀들이 어떤 연유인지 모르겠지만 매우 질서 정연하게 자라고 있었서 우리는 사람들이 이곳을 관리하고 있는지 궁금해했다. 태양이 작렬하는 자갈길의 온도가 올라가는 오후에 사람들은 발 부상을 많이 당하게 된다. 발바닥의 온도가 올라가 땀 이 차면 양말이 젖고 어김없이 물집이 생기기 때문이다. 페페도 발이 아파서 잠시 바닥에 주저앉았다. 바늘로 물집을 한 땀 따고 밴드를 붙이는 걸 도와줬다. 

어제 독일 친구 프레데리케와 순례길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순례자들이 거치게 되는 3단계의 심리적 페이즈에 대해 듣게 되었다. 순례길에서 경험하는 첫 번째 심리적 페이즈는 관찰(Observation)이라고 했다. 이 단계는 생소한 순례길에서 걷는 것, 먹는 것, 자는 것에 대한 적응기를 거치는 것을 말한다. 보통 메세타 지역에 도착하면 보통 이 관찰의 단계는 어느 정도 지나게 되고 어느새 순례길에 적응하기 시작한다고 한다. 두 번째 심리적 페이즈는 반영(Reflection)이라고 했다. 반영은 순례길에 조응하게 되는 심리적, 육체적 상태를 말한다. 나의 경우, 길을 걷기 시작한 후 약 2시간 정도가 지나면 어느새 걷는 행위는 의식하지 않게 된다. 어느 순간 육체와 마음이 길 위에서 그저 열려 있는 상태로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이런 특별한 상태에 이르게 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걷는 것을 활동적인 명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반영이란 아마도 순례길을 걷는 동안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서 몸과 마음이 열려가는 상태의 단계를 이야기하는 것일 거라고 생각했다. 순례길 심리적 페이즈의 세 번째는 해결(Solution)이라고 했다. 우리는 아직 해결의 단계에 이르지 못해서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를 이야기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대충은 알 것도 같았다. 하지만 해결이라는 정답 같은 것에 굳이 얽매일 필요가 있을까? 

그 많던 순례자들의 인생에 닥친 문제들은 잘 해결이 되었을까? 아마도 해결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어떤 구체적인 것이 아니라 나의 내부에서 어떤 실타래가 조금씩 풀려가는 것일까? 수많은 생각들이 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사라지고 있었다. 길을 걷다 보면 엉킨 실타래의 처음과 끝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지만 그 생각에 몰두하다 보면 그것도 결국은 다 허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애시당초 해결할 수 있는 인생의 문제라는것이 있었나 싶다.

그래서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은 그렇게 내버려 두자는 것이었다. 머릿속의 엉킨 실타래는 그냥 내버려 두고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여도 괜찮을 것 같았다. 길을 걷는 동안 어떤 한 가지 생각에 몰두하기보다는 그냥 내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는데 집중 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나는 이곳에 정답을 찾으러 온 것이 아니니까. 입력값을 집어넣고 어떤 결과물이 연산되길 기다리는 마음으로 이곳을 온 게 아니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되니까. 내 인생이 결코 순례길로 인해 더 행복해지거나 대단해질 리가 없다는 생각으로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이. 욕심도 없이. 그저 감사하게 걸어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순례길 DAY 12. Hornillios del Camino - Castrozeriz 


메세타 고원이 걷기 지겨운 길이라는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들었었다. 무슨 말인지 알 것도 같다. 하지만 나에게 누가 순례길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언제였냐고 물으면 난 이날 아침을 꼽을 것이다. 천천히 움직이는 지평선에 걸려있는 구름 사이로 내 발자국 소리 외엔 들리지 않는 깊은 고요를 만끽하며 걸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마치 천공의 성 라퓨타의 하늘섬을 걷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일행들 역시 침묵 속에서 이 풍경을 오래 기억에 담으려 애썼던 것 같다. 아름다운 순간은 언제 찾아올지 모른다. 그러니 순례길을 걸으며 남의 견해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그저 있는 그대로의 모든 순간에 몸과 마음이 열려 있다 보면 그 순간을 만끽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한참 동안 하늘의 구름들을 만끽하며 걸으니 어느새 저 멀리 언덕에 무너져가는 오래된 성이 있는 마을이 시야에 들어왔다. 흡사 제주도의 오름을 연상시키는 언덕에 기대어 살고 있는 정겨운 마을의 풍경이 보기 좋았다. 지나쳐오긴 했지만 이 마을에는 한국사람들이 운영하는 알베르게도 있는 것 같았다. 오리온 알베르게라는 곳인데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알베르게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가격이 싼 공립 알베르게에 묵기로 했다. 아직은 한국음식 때문에 굳이 좀 더 비싼 숙소에서 묵을 필요를 느끼지는 못했다. 

저녁식사를 하고 알베르게 친구들과 함께 언덕을 올라 일몰을 보러 가기로 했다. 저녁이 되니 금세 기온이 떨어져 추워졌다. 고원지대의 3월 날씨는 여름과 겨울을 오갔다. 어느새 넘어가는 해가 만들어 놓은 거대한 그림자에 마을이 포개졌다. 이 마을은 9세기말에 아랍인들에 대항해 이 언덕에 요새를 건설하면서 형성되었다고 한다. 언덕에 오르면 왜 이곳에 요새를 건설했는지 금방 알 수 있다. 한눈에 멀리 몇 km 까지 시야에 들어오고 오랜 세월 동안 바람과 비에 땅이 조금씩 깎여 분지가 된 주변땅에 물이 흐르니 농작물 재배가 가능해 자연스럽게 부락을 형성하고 살 만한 곳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렇게 발전하게 된 이 마을은  장장 781년 동안 지속된 이베리아 반도서 벌어진 아랍인들을 상대로 한 전쟁기간 동안 산티아고로 향하는 순례자들을 보호하는 이정표 같은 역할을 해왔을 것이다. 언덕에 높이 솟은 성벽에 꽂힌 깃발을 보고 메세타를 넘은 순례자들은 한숨을 돌렸을 것이다. 마을과 마을사이의 평원은 그 누구의 차지도 될 수 있었고 언제든 살육이 벌어질 수 있는 안심할 수 없는 장소였을 테니 말이다. 

우리는 성에 올라 천천히 메세타 저편으로 저물어 가는 노을을 감상했다. 저 길을 향해 걷다 보면 우리의 목적지인 산티아고, 그리고 이베리아 반도 서쪽의 끝인 피네스테레(Finesterre)에도 언젠가 닿을 것이다. 모두 건강히 무사히 목표한 곳에 도착하기를 바랐다. 이날 보았던 멋진 풍경들이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쉬워 잠을 잘 이룰 수 없었다. 


#순례길 #메세타 #트레블로그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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