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Palas De Rey - O Pedrouz
순례길 DAY 31. Palas de Rey - Arzua
순례길에서 나는 주로 외국인 동료들과 함께 걸었다. 순례길 첫날부터 알고 지낸 페페, 프레데리케, 마르코는 여전히 함께 하고 있고, 여기에 레온을 지난 이후에 새롭게 만난 친구들이 하나둘 그룹에 합류했다. 그들 한 명 한 명 다 각자 흥미롭고 재밌는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짧은 소개를 하자면 이렇다. 예전에 소개했던 나의 순례길 절친 페페, 남미에서 일을 마치고 새로운 인생설계 중인 독일인 친구 프레데리케, 이태리 출신 피지오테라피스트이자 여자사랑이 넘치는 마르코,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알코올중독에 시달리다 순례길을 오게 된 네덜란드 게이 변호사 마르타인. 마케팅 일을 하다가 전업준비를 하고 있는 독일친구 브레니, 이름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 브라질 출신의 변호사 친구(순례길 도중 마르코와 연인이 되었다.), 너무나 착한 스페인 게이커플과 해맑고 춤 잘 추는 다니, 그리고 마드리드 출신의 말 많은 알바로, 한국영화 특히 박찬욱을 좋아하는 덴마크 출신의 마케터 닉, 이름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 수줍음 많던 벨기에 아저씨 등등..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을 순례길에서 만났다.
부르고스에서 헤어졌던 한국인 동료 2분을 제외하면 순례길 내내 거의 한국사람들과 자주 만나거나 친해질 기회가 적었다. 묘하게도 타지에서 한국인을 만나면 반갑기는 한데 어색하고 친해지기 어렵다. 이곳에서 한국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일아나게 되는 동어반복적 상황이 싫기도 했다. '어디서 오셨는지.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무슨 일을 하셨는지' 등등 너무나 뻔한 이야기를 하게 될 것 같아서 굳이 한국사람들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외국인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한다고 뭔가 색다른 대화를 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그래서 친하게 지내던 동료들과 주로 소통을 하다 보니 새롭게 만나는 한국사람들과 이야기하거나 식사를 따로 할 상황이 자주 생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두 분씩 지나가며 인사를 나누며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면 참 멋진 분들이 순례길에 오셨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게 아쉽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다행히 악명 높은 진상 한국인 순례자들을 만나지 않았다. 대부분 친절하고 배려할 줄 아는 멋진 분들이었다.
함께 걷는 사람들로부터 듣게 되는 인생 사연 하나하나 모두 재밌고 소중했다. 각자 출신도 다르고, 성별도 다르고, 성적취향도 다르고, 성격도 다른 사람들이 하나의 도전을 위해 이곳에 모여 정답이 없는 인생에 대해 토론하고 웃고 떠들고 술에 취했다. 순례길이 끝난 후 모두들 인생의 새로운 국면에서 보다 나은 해결책을 찾았는지 모르겠다. 나이가 어리거나 많거나 관계없이 우리 모두 궁금해했다. 우리 앞에 놓인 길을 어떻게 걸어야 할지. 그렇게 각자의 문제들에 골몰하던 사람들이 이곳에서 동질감을 느끼고 연대하면서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자리에 모였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린 모두 이 짧은 삶을 더 사랑하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기 위해 이곳을 찾은 것이다. 이 뜨거운 열정을 가진 순례자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순례길은 결국 사람이다.
순례길 DAY 32. Arzua - O Pedrouz
앞선 글에서 소개했던 문학 관련 팟캐스트 문학동네 채널 1. 방송에서 권희철 문학평론가는 필립 로스(Philip Milton Roth)의 유명 작품 '울분'을 해설하면서, 고전문학에서 주로 나타나는 행복과 자유를 서로 상반되는 행동개념으로 설명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 마커스는 행복한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 있었던 부모님이 계시는 마을을 떠나 자유를 찾아 떠나지만 그가 추구했던 자유는 결국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만다.
(좀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느끼지만) 행복이 어떤 상태에 만족감을 느끼고 그 상태에 머무르고자 하는 정중동의 정의 상태라면 자유는 만족감을 느끼는 상태에서 벗어나 진취적인 방향으로 삶의 행로를 변경하는 동의 상태라고 평론가는 설명한다. 그러므로 행복이 소설 속 등장인물이 다소 보수적 만족감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면 자유는 그 인물을 움직이게 하는 동기로 작동한다고 한다. 오래전에 한번 들었던 내용이었지만 당시엔 내게 큰 인상을 남기지 못했던 설명이었다. 하지만 며칠 전 다시 이 방송을 듣고 한동안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되었다. 나에게 행복과 자유는 어떤 것인가? 인간적 개념으로 구획 지어진 이 단어들이 나에게 작동하는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길을 걷다가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나에게 행복과 자유는 모두 ‘관계’에서 비롯되는 감정 혹은 경험일 거라는 생각이었다. 사람, 자연, 사물 혹은 사상 그 무엇이건 나와의 관계를 맺은 것들로 인해 나는 행복이라는 감정을 느낀다. 나에게 관계란 나무의 뿌리 같은 것으로 나무가 땅 속 깊이 뿌리를 뻗어 양분을 얻듯이 나는 다양한 관계로 뻗어가고 그 관계들로 인해 행복을 느낀다. 자유는 행복과 반대반향으로 자란다. 나에게 자유란 관계들로 형성된 뿌리가 땅을 뚫고 싹을 틔우는 나만의 고유성 같은 것이다. 나의 자유 혹은 자유의지는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고 싶어 하는 자아실현의 다른 이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따라서 나에게 행복과 자유는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동시에 맺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행복과 자유에 대한 고민들은 결국 그 뿌리인 ‘관계’들의 상호작용을 살펴야 어떤 해답을 이끌어 낼 수 있겠구나 하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깊숙이 관계의 건강한 뿌리를 땅에 내리고, 자유롭기 위해서는 나만의 고유성을 가지고 하늘로 뻗어갈 줄 아는 것. 이 균형을 잘 유지하며 나이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소주 한잔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함께 나눌 사람들이 새삼 그리워지는 날이었다. 이 글을 여기까지 읽은 분들 역시 당신에게 행복과 자유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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