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겁게 퇴근하고 나면 퇴근하는 자체에 너무 기뻐한 나머지 남은 기력이 없어 바로 침대로 향하게 된다.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나의 귀여운 고양이에게 잠깐 인사를 하고 하도 같은 자리에 누워 미세하게 움푹 팬 매트리스에 몸을 맡긴다.
미세한 구멍이 뚫린 풍선처럼 매트리스가 몸무게에 천천히 가라앉는 감각을 느끼며 내 눈두덩이는 서로 손을 마주 잡으려 아우성이다. 퇴근 후 무엇인가 하겠다는 의지는 그렇게 여름날 모기처럼 훅 사라진다.
그다음 날은 눈물 나도록 억울한 출근길이 된다. 분명 퇴근하고 생산적인 일을 하겠다는 의지가 충만했는데 항상 이 요물 같은 침대에 지고 만다. 침대는 승률 100%를 자랑한다. 진 적이 없다.
오늘은 꼭 책도 읽고 필사도 하고 그림도 그리겠다며 머릿속 백지에 하나하나 체크리스트를 적어두고 출근을 한다. 한 편으론 과연 체크란에 빨간 브이자를 그릴 수 있을지 본인도 의심스럽다.
의지와 의지를 끌어모아 퇴근 후 물 먹은 솜뭉치처럼 무거운 몸을 이끌고 겨우겨우 책상 앞에 앉는다. 역시 눕기만 하면 금방이라도 잠들 것 같은 얼굴이다. 책상 앞에 앉는 거사를 치렀으니 무언가 해야 된다는 부담감이 한컴 타자 연습게임처럼 내리친다. 오늘의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지칠 대로 지친 몸은 목 안쪽부터 길게 한숨을 뱉는다. 책이라도 몇 페이지 읽어볼까 펼쳤지만 흰 설원 위에 검은 발자국이 찍힌 듯 글자 하나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글을 써도 그림을 그려봐도 마찬가지이다. 하기 싫다는 마음만 가득하니 미간이 잔뜩 좁혀져 있다.
문득 왜 퇴근 후 억지로 무언가를 하려고 했는지 생각해본다. 첫 문장처럼 써 내려간 첫 마음은 조금이라도 하루를 즐겁게 마무리하고 싶어서였다. 억지로 몸을 앉혀 행하는 기분을 상기해봤다. 즐겁지 않았다. 억지로라도 하면 반드시 남는 게 있다고 하는데 억지로 행하는 손엔 조각난 감정밖에 남지 않았다.
하던 것을 저장하고 바탕화면을 깨끗이 정리했다. 부담감과 부서진 감정을 내려놓고 침대에 누웠다. '해야 하는데.' 이 생각도 내게 금지했다. 해야 할 일을 계속 생각하며 전전긍긍하는 마음도 꺼뜨렸다.
부담감은 이스트 같다. 스트레스와 피로를 한데 뭉친 반죽에 솔솔 뿌리면 세 가지 효모가 합쳐져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잠시 부담감을 내려놓고 생활하니 스트레스와 피로만 남았다 (슬프게도). 더 이상 부풀지 않게끔 카페인으로 비닐랩을 씌워본다.
나의 귀여운 고양이에게 인사하며 놀아줄 여유까지 있는 오늘 저녁, 커피 한 잔을 내려 컴퓨터 앞에 앉아 메모장을 켰다. 오늘의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반드시 무언가를 해야 되는 건 아니다. 하고 싶은 것이 생기면 하고, 말면 마는 거다. 부담 없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