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감정과 욕망도 어린 날의 특권이었나
여의도를 갈 때마다 나를 설레게 했던 곳이 있었다. 바로 콘래드 호텔. 고등학생 때였나, '다시 태어나면 저렇게 태어나고 싶다'를 꿈꾸게 했던 아이돌이 한 프로그램에서 그의 언니와 숙박한 걸 본 이후 콘래드 호텔은 내게 로망 그 자체였다. 그러던 작년, 타이밍 좋게 보너스가 생겨 콘래드로 호캉스를 다녀왔다. 1박 2일 동안 궁금했던 모든 걸 다 경험하자 미련이 없어졌다. 그리고 난 더 이상 여의도에 갈 때 설렘을 느끼지 않는다.
누군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욕망할 때가 가장 설레지, 실제 대상을 갖고 나면 허망하고 시시해져서 결코 욕망하는 것을 구매하지 않는다고. 내가 차를 살 때 아빠도 그런 말을 했다. 명품을 사면 설레는 기간이 1개월이고, 차를 사면 1년이랬나. 나는 '차'를 구매하는 것보다 '언제든 원할 때 사용할 수 있는 옵션을 내 삶에 추가했다'는 게 포인트였기 때문에 아직도 차를 볼 때마다 설레지만 확실히 처음과 같은 감정은 아니다. 어제 오랜만에 방문한 여의도에서도 설렘이 없어졌단 걸 알아차렸을 때 조금 슬펐다. 이제 이곳에 대한 기대가 없어졌구나. 새로운 상품은 내 욕망이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생기지만 그렇다고 내가 욕망할 것들 또한 비례해 늘어나진 않는다. 추억이나 로망, 시기와 허영 등 욕망을 충동질할 총알이 있어야 과녁이 의미가 있지 내가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이상 이 모든 것들은 꽃피지 못한 씨앗이나 다름없다.
며칠 전에는 인사이드아웃 2를 봤다. 사춘기를 맞이하고 어른이 될 준비를 하는 라일리의 안은 이전처럼 기쁨, 슬픔, 버럭, 까칠, 소심이의 주무대가 아니다. 그 자리는 불안, 부럽, 당황, 따분이 채운다. 내가 주목한 건 이전의 감정들은 매우 단순하고 명백한데 반해 새로운 감정들은 훨씬 복잡하다는 점이었다. 어른이 될수록 우리는 동일한 상황에도 이전에 느꼈던 기쁨과 분노보다는 복잡한 계산과 겹겹이 층진 감정들로 혼란을 느낀다. 앞선 사례에 대입해 보자면 이전에 콘래드 호텔을 봤을 땐 마냥 '설렌다! 가고 싶다!'의 감정이, 이젠 '겪어보니 별 거 아니더라. 그것도 어찌 보면 어릴 적 로망 때문이겠지? 요즘엔 그 정도 시설이 대부분이니. 막상 다녀오니 허무하기도 하고, 가지 말걸 그랬나? 그치만 나쁘지 않았잖아?' 하는 등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복잡한 생각으로 바뀐다.
순수한 감정과 욕망도 어릴 때나 존재하나. 이성보다 직관에 의해 반응했던 때가 언제인가를 돌이켜본다. 호르몬의 무자비한 횡포로 '지금 당장 단 걸 먹어야 한다!!'라고 반응한 오늘 아침을 제외하곤 딱히 생각나지 않는다. 무언가를 욕망해도 욕망 자체보다 어떻게 실현할지 방법론에 치중하고, 무언가를 얻은 기쁨에도 앞으로의 유지 방법을 고민한다. 그러고 보면 현재보다 미래 시점을 고민해서 순수함이 퇴색되기도 한다. 인사이드아웃 2의 불안도 현재의 상황보다 미래를 끊임없이 고민해 활성화된 아이 아닌가.
복잡한 감정을 분해해 봐도 좋겠다. 당혹감은 뭘로 분해할 수 있을까. 놀라움, 불편함, 화남, 부끄러움 혹은 민망함 정도? 미련은? 아쉬움과 은은히 깔린 슬픔으로 표현되겠지. 이렇게 분해하다 보면 의식 너머에 있던 기쁨, 슬픔, 분노, 까칠, 소심도 서로 껴안던 팔을 풀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내게 돌아오려나. 그때가 오면 난 또 무언가를 순수하게 바라고 소원할 수 있을까. 아, 어른의 이런 복잡함 싫다 싫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