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드라마 '돌풍' 후기
볼 게 차고 넘치는 시대에 드라마는 손이 잘 가지 않는다. 12부작 정도를 이어봐야 한다는 부담도 있고 취향에 맞는 드라마를 찾기 어려워서. 문화생활도 시간이나 마음을 내준 '투자' 대비 즐거움을 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되는 게 슬프지만 결국 그렇게 된다. 차라리 한번 빡 집중해서 볼 수 있는 책이나 영화를 보지. 그런 내가 3일 만에 끝내버린 드라마가 있다. 바로 오늘 이야기할 넷플릭스 드라마 '돌풍'이다.
후기를 쓸지 말지 망설였다. 드라마에서처럼 과거에 적은 글들이 미래 내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사실도 알고, '그럴 의도가 아니더라도' 잘 짜깁기 된 이야기들이 얼마나 빨리 퍼져나가는지 알기 때문에. 개인적인 후기치곤 비장한 마음이지만 정치 성향이나 특정 인물에 대한 애정, 안타까움과 상관없이 이 드라마를 추천하는 이유 정돈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한번 써봅니다, 추천 이유.
첫째, 전개 속도가 미쳤어요.
이 드라마에선 자잘한 얘기들은 나오지도 않는다. 투톱인 박동호(설경구 역)와 정수진(김희애 역)이 어떻게 자신의 가치관과 정치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지만 집중한다. 로맨스 드라마였다면 서브 커플은 존재할 틈도 안 줄 듯한 느낌이다. 잔가지를 쳐내고 중심인물과 연관된 전개가 계속되니 몰입감은 저절로 따라오고 복선이나 간접 묘사를 이해하기 싫은, 피로한 현대인들이 보기 딱이다. 보고만 있어도 다음 장면에 이유랑 근거가 나오거든요. 드라마를 같이 본 엄마는 한 회가 끝날 때마다 "15분 밖에 안 지난 거 아니야?"라는 얘길 했는데 이 문장이 전개 속도와 몰입감을 전부 표현한다. 마지막화가 40분이 채 안 되는 것도 실험적인 시도였을텐데(어쩌면 분량을 채울 내용이 없었을 수도 있지만) 늘어짐을 방지하고 효율적으로 끝낸 것 같아 마음에 든다.
둘째, 생각할 거리가 많다.
예술의 가치는 무엇일까. 겪어보지 않은 상황에 스스로를 대입하고, 나라면 어떤 선택을 내릴까 고민하고 그 과정에서 중요시하는 가치를 발견하게 만드는 것 아닐까. 이 과정에 필요한 질문을 잘 이끌어내냐 아니냐에 따라 드라마의 작품성이 결정된다. 그렇다면 돌풍의 작품성은 꽤 높다 판단하는데, 드라마를 보며 내가 고민한 거리만 해도 다음과 같다.
- 선과 악은 평면적이고 단순한가. 입체적이라면, 그 둘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 원칙을 내세우다 본인이 원칙이 되어버린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
- 선을 실현하기 위해 악을 (잠시라도) 이용하는 것은 옳은가.
- 과거의 영광 혹은 노력이 현재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될 수 있는가.
- '강압'에 의한 선택도 자기 의지에 따른 선택이라고 볼 수 있는가, 그로 인해 악이 발생한다면 강압에 책임을 물어야 하나 혹은 자기 선택에 책임을 물어야 하는가.
- 자기 정당화와 거짓을 구분하는 척도는 무엇인가.
- 정말 '거짓을 덮는 것은 진실이 아닌 더 큰 거짓'인가?
- 개인의 가치관 실현을 위해 정치를 이용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볼 수 있는가?
- 무엇이 옳고 그름을 개인이 판단하는 것의 위험성은 얼마나 큰가?
- 정치의 본질은 무엇인가?
등등..
질문에 대한 해답은 지금 당장 내릴 수 없지만 생각해 볼 가치가 있는 질문들이다. 개인적으로 난 첫 번째 질문이 가장 와닿았는데 원론적으로 생각해 보면 선과 악은 쉽게 떼어놓을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드라마에서 선했던 사람이 악인이 되고, 선하고자 하는 사람이 악을 이용하고, 악했던 사람이 자신만의 선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며 이들을 선인 혹은 악인이라 단정 지을 수 있을까 고민했다. 특히 정수진을 보며 이 생각을 많이 했다. 자신에게 트라우마를 안겨준, 악의 정점이라 여긴 조상천 의원과 결탁하는 모습을 보며 대중적인 선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선조차 무너뜨린 그녀가 지독하게 아프게 느껴졌다.
셋째, 연기력 구멍이 없다.
드라마를 볼 때 몰입을 흐리게 하는 큰 부분이 배우들의 연기력이다. 설경구 배우는 이전부터 정치, 범죄 영화에 자주 등장했던지라 별 걱정도 없었지만 큰 기대도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 회에서 원칙을 실현하기 위해 나섰지만 한 인간으로서 유약함과 고독을 절절히 느낀 대통령의 마지막을 연기한 그의 모습은 정말이지 압권이었다.(누군가 떠올라서 더 마음이 아팠다) 김희애는 '저 사람 지금 눈이 돌아있잖아'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광기 어린 욕망과 신념을 잘 표현했다. 드라마 내용상 표면적으로 '선'을 대표하는 인물이 박동호라 더 이입되기도 했지만, 김희애가 설경구 앞에서 '그러니까 나한테 까불지 마' 할 때는 욕이 절로 나왔다. 결국 드라마는 팬시한 세트나 특수효과가 아닌 인물과 배우가 살린다는 걸 다시 확인했다.
언젠가 정치에 발을 담가보고 싶었다. 정치적 야욕이나 명예욕이 있진 않고, 정치판이야 말로 홍보의 주축인 셀프 브랜딩과 프레이밍이 가장 자주, 효과적으로 일어나는 곳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드라마 '돌풍'에서도 이런 상황들은 비일비재하게 등장한다. 논점을 흐리고 본인에게 유리한 쪽으로 틀을 짜거나 거짓 정보를 언론에 흘리고 단체들을 활용하는 건 기본이다. 그 안에서 국민들은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휩쓸리기 바쁘다. 드라마와 다르지 않은 현실에, 그 국민 중 내가 한 명이라는 사실에 부끄럽고 정치판에 들어가고 싶어 한 마음이 유치했다. 돌풍은 한 개인이 만들 수 없다. 하나의 시발점을 주축으로 주위가 돌고 돌다 보면 원심력에 의해 바람이 되고, 흐름이 되고 돌풍이 된다. 우리는 누군가 바라는 대로 돌풍을 만들어주는 사람들인가. 아니면 휩쓸리는 돌풍에도 뿌리내려 자신의 신념을 이야기할 수 있는 국민인가. 이 질문을 다시 할 기회를 만들어준 것만으로도 이 드라마의 가치는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