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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er Lucy Jul 02. 2024

공백이 없는 세상에서 공백이 주는 아름다움을 찾다.

비어있기에 느낄 수 있는 어떤 중요한 것.

인스타 릴스를 하릴없이 넘기다 조성진의 연주 영상을 마주쳤다. 암묵적인 '시-작!'과 동시에  바로 곡을 연주하는 것이 아닌, 주변의 공기를 분위기로 탈바꿈하고 음악에 스미듯 연주하는 그의 모습을 홀린 듯 보고 또 봤다. 이런 게 거장의 음악인가, 이런 게 예술인가. 그가, 그의 음악이 이토록 아름다운 이유를 계속 고민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어느 날 불현듯 깨달은 이유는 바로 '공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백을 국어사전에 치면 '아무것도 없이 비어있음'을 의미한다고 쓰여있다. 조성진의 음악에는 공백이 있었다. 이 공백은 연주자가 청중에게 음악에 이입하게끔 제공하는 시간이자, 예술에 관한 태도를 보여주는 메타포였다. 비어있음으로 완성되는 것.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낯선 내용도 아니다. 우리는 장식 하나 없는 조선백자에서 세월이 지나도 변치 않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여백의 미'라는 말은 귀에 딱지가 앉게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공백이 존재할 곳이 어디 있나. 어느샌가부터 공백은 불완전해 채워야 할 상태로 여겨지며 공간과 시간, 관계를 메우는 수많은 것들이 이 세상을 팽팽하게 옥죄고 있다.


이 중 주로 이야기하고 싶은 건 시간이다. 빨리빨리의 민족이란 말은 식상할 정도로 우리 사회, 문화, 경제 전반의 모든 시간은 너무나 촘촘해졌다. 민족성을 탓하려는 건 아니다. 세계 전반의 흐름이 모두 그렇게 변화했기 때문이다. 이제 전 세계인들은 1분 단위로 계획을 짜고 10초짜리 영상으로 정보를 습득한다. 전주가 있는 음악은 없어진 지 오래고 노래가 시작하자마자 리스너들의 귀를 휘어잡는 강렬한 훅이든 때려 박는 랩이든 나와야 릴스, 틱톡에서 흥행한다. 대화도 마찬가지다. 에둘러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함의가 무엇이건 음침한 사람 취급을 받고, 표현을 직접적으로 하지 않는 충청도식 화법은 속 터진다며 욕을 먹기 일쑤다. 이런 대화가 화를 유발하는 이유는 대화의 효율성이 떨어지고 상대방이 한 이야기의 속뜻을 되짚는데 필요한 시간적, 심적 공백이 없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화자의 뜻을 헤아려야 하는 독서, 2시간 이상의 영화 감상이 외면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나 역시 유튜브를 2배속으로 재생하며 영상을 튼 지 10초 안에 볼지 말지를 결정하는 인물이기에 개인적인 책임을 묻고 싶지 않다. 실제로 원인이 개인에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책임을 물을 개인이라면 현재 산업, 사회를 주도하는 유수 기업들의 수장들에게 책임이 있지 않을까. 숏폼이 산업의 주 유통로이자 홍보책, 자산이 될수록 짧은 시간에 보여줘야 할 것들은 점점 더 많아진다. 1초가, 아니 0.1초가 돈이 될 수 있는 산업에서 공백을 선보일 미친 자가 누가 있겠는가. 이런 흐름은 우리에게 '시간의 비움'을 허용하지 않는다. 더 채우길, 메우길 원할 뿐이다.


조성진 영상이 끝나고 나온 다음 영상은 옛 가수 이상은이 '언젠가는'을 부르는 라이브 영상이었다. 전주가 이어지는 동안 이상은은 카메라 너머에 있는 관중을 향해 눈을 반짝이기도 하고 마이크를 휘저으며 몸을 추스리기도 하고 멜로디에 맞춰 가사를 생각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입 하나 뻥끗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느껴졌고, 노래의 1/3이 저절로 완성된 느낌이었다. 요즘엔 그런 음악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게 날 슬프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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