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보단 내가 표현하고 싶은대로 표현하겠어요.
라디오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사람들이 분명 경험하고 느끼지만 일컫는 단어가 없어 모호한 개념을 문학에서 정의 내리는 경우가 있다고. 작가가 작품 속에서 해당 개념에 이름을 달아줌으로써 모두가 표현할 수 있는 무언가가 된다는 거다. 시간이 지나 예시로 든 단어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름을 짓는다'는 행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계기였다.
'이름'하면 한국인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김춘수 시인의 작품 '꽃'에서 이름은 사랑하는 이를 향기롭고 어여쁜 꽃으로 만개하게 하는 낭만적 도구다. 덕질을 할 때도 '어쩜 얘는 이름도 000이야?'라고 감탄할 때가 덕질의 정점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이름은 그 자체로 사랑의 대상이자 상대가 지닌 의미를 증폭시키는 매개이며, 앞서 말한 경우처럼 설명하기 복잡한 대상을 간편하게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다. 하지만 점차 그 안에 담긴 가치는 퇴색되고, 효율적인 의사소통을 명분으로 과도하게 압축된 의미의 덩어리로 전락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학문에 사용되는 이름들이 대표적인 예다. 특정 학문에서 지식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많은 개념을 포괄하고 빠르게 설명 혹은 이해하기 위해 많은 대상에 이름이 붙기 시작한다. 개인적으로 미술학에서 그걸 가장 많이 느끼는데, 전시회의 소개글에 담긴 '~주의', '~화풍' 등으로 압축된 개념은 매끄럽게 읽히지도 않을뿐더러 예술을 즐기고 싶은 이들에게 두터운 장벽처럼 느껴진다. 이런 고충을 타과 박사 전공의에게 얘기한 적이 있는데 미술계에서는 오히려 개념을 풀어쓰는 게 더 혼란을 일으킨다 생각해서 그런 방식을 선호한다고. 지식의 벽을 넘어간 사람과 외부에 있는 사람의 입장 차이겠지만 적어도 각주라도 달아주실 순 없는지.
의학계에서도 필요 이상의 명명은 부작용을 일으킨다. 심리학에서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DSM)이 등장한 이래, 정신 병리를 감정하는 과정에서 사소한 증상까지 이상 징후 혹은 병으로 명명해 버려 필요 이상의 처방을 하는 부작용이 생긴 경우가 많아졌다 배웠다. 특이한 건 환자들 역시 점점 본인들이 겪는 증상이 특정 병명으로 진단되는 상황에 안도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불안, 우울 등의 감정 변화부터 약간의 두통, 몸살까지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던 검색 엔진의 도움을 받아서건 어떤 병에서 기인했는지 정확히 알아야 마음이 편하고 대응 방안을 강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냥 날씨가 추워져서, 면역력이 잠깐 떨어져서, 특정 호르몬이 요동쳐서 등 병으로 생긴 증상들이 아닌 것이 많을 텐데도 말이다.
사회문화적 측면의 문제도 있다. 섣부르고 어설픈 이름 짓기가 불필요한 편견 혹은 선입견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경제 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을 백수라 통칭하기로 했다고 치자. 백수라는 이름 아래는 한심함, 무능력, 뻔뻔함 같은 부정적 이미지들이 상품 라벨처럼 달랑거린다. 하지만 경제 활동은 하고 있지 않지만 자원봉사를 하는 사람이라면?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고 있는 예술가라면? 그들에게도 같은 평가를 내릴까? 이야기를 보충하기 위해 하나의 예시를 더 들어보자. 캥거루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부모님에게서 독립하지 않고 같이 사는 이들이니 무능하고 정신적으로 어리다고 판단하는가? 하지만 아픈 부모님을 부양하기 위해서라면? 노령인 부모님의 요청으로 같이 사는 거라면? 이처럼 사회에서 특정 단어로 다수를 묶는 순간 개인의 스토리와 인격 등 백그라운드에 대한 관심은 모두 차단되며 그의 삶은 쉽게 재단되고 평가된다. 사회에서 특정 성향 혹은 특징을 갖고 있는 그룹을 편하게 칭하기 위한 방법이겠지만 불필요한 갈등과 편견을 불러일으키는 주범이 되기도 한다.
김영하 작가는 본인의 작문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대부분의 부정적인 감정을 '짜증 난다'라고 표현하길래 해당 표현을 제외한 단어를 사용하도록 훈련시켰다고 한다. 아무래도 작가 지망생들이니 그런 훈련이 더 필요했겠지만, 우리 역시 명명된 개념을 벗어나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만으로 사고와 이해를 확장시킬 수 있다. 앞서 이야기한 사례들처럼 빠른 소통을 위해 성급하게 지어진 이름을 사용해 포함해야 할 개념을 포용하지 못하는 일은 이름에서 자유로워짐으로써 방지할 수 있다. 소중한 대상일수록 뭐라 칭할 방법을 찾지 못해 한참 고민하던 그때처럼, 어떤 것은 이름 짓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는 것도 방법 아닐까. 나부터 시작해 보자. 애인을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 현실과 낭만의 경계를 잇는 부드러운 파스텔이라 부르고 싶다. 지금 이 글을 보는 독자는 뭐라 부를 수 있을까. 글로써 우연히 나의 세계에 발을 들인 고마운 이방인이라 부를까. 당신은 이 글을 무어라 부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