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건 시리즈 2탄의 시작...?
자취라곤 해본 적 없는 내가 자취 생활을 엿볼 수 있을 때는 바로 엄마가 자리를 비울 때다. 아빠야 직장 생활로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나가있으니 집순이인 엄마가 외출한다면 그날이 바로 자유의 날인게지. 최근 엄마가 2주간 집을 비울 일이 있어 집안 살림 모두 내가 해야 하는 상황이 왔더랬다. 저번처럼 만들어놓은 음식을 다 먹지 못해 꾸역꾸역 해치워야 하는 불상사가 일어날까 "뭐라도 해놓고 갈까?" 하는 엄마의 등을 세차게 밀어내며 "걱정 말고 다녀와!" 하며 호언장담했고 며칠간은 온전한 자유를 누리며 행복했다. 엄마랑 사이가 안 좋은 것도 아닌데 자릴 비워서 느끼는 이상한 해방감이 있단 말이지 후후.
하지만 자유도 오래 즐기다 보면 자유가 아니게 되는 법. 심각성을 느낀 건 식사 메뉴를 고를 때였다. 아무것도 하지 마!라고 소리칠 때 몰랐던 건 냉장고에 뭘 할만한 재료가 없다는 것이었다. 기본적인 양념을 할 때 들어가는 파, 양파만 조금 남아있을 뿐 선택지가 거의 없었다. 나만 끼니를 해결하면 된다면 상관없지만 하루 한 끼를 집에서 먹는 아빠에겐 뭐라도 차려줘야 했다. 처음엔 몇 알 남아있는 감자와 양파를 넣고 감자볶음을 했고, 통조림 햄을 굽거나 통조림 꽁치로 꽁치조림을 하기도 했고 달걀국을 끓이기도 하고 볶음밥을 하기도 하고 냉동실에 있는 재료로 어묵볶음, 멸치볶음, 만둣국도 하고 카레도 했다. 나름대로 변주를 줘봤지만 아침 밥상에 앉으면 왜 매번 식사 담당이 아침을 먹으면서 저녁 메뉴 고민을 하는지 그 마음이 이해가 되고도 처절히 느껴져 슬플 지경이었다. 아씨, 오늘은 뭐 하지. 진짜 아무것도 없는데!!!!!!!
결국 파, 양파까지 씨가 마른 냉장고를 보다가 대형마트에 장을 보러 갔는데 웬, 지금 이 가격이 맞나요? 하는 게 한둘이 아니었다. 나름 장을 자주 봤기에 식료품 시세에는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집에서 두문불출한 며칠 동안 야채 가격이 왜 이리 많이 오른 건지. 양도 문제였다. 나도 밥을 많이 먹어봤자 하루 한 끼 챙겨 먹고, 아빠도 한 끼 밖에 안 먹는지라 둘이 소비하는 속도엔 한계가 있는데, 양파도 버섯도 다 너무 양이 많은 것 밖에 없었다. 한 개씩 사려면 또 가격대나 신선도가 마음에 안 들고. 결국 내 사랑 콩나물을 한 움큼 집고 청경채, 양파와 아빠를 위한 닭다리살 등을 사서 집에 왔다. 콩나물로는 나를 위한 빨간 콩나물 무침을 한 무더기 해놓고 청경채는 줄기대로 잘라 냉동새우와 함께 볶아 내놓기도 했다. 양파는 8개 망으로 일단 두어 개 정도 쓰고 나머지는 망 그대로 베란다에 두었는데 며칠 뒤에 보니 상태가 물러 일부는 버려야 했다. 에잇.
이 과정 속에서 내가 느낀 건 실제 자취를 했다면 내가 '해 먹는' 비건식을 시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자취하는 친구들이 요리도 귀찮고 과정도 번거로워 배달음식이나 즉석식품으로 끼니를 '때우다'시피 한다고 말할 때마다 짐짓 보호자인양 "그렇게 먹으면 건강에 안 좋아"라고 했던 지난날의 내가 호기롭게 느껴질 정도였다. 채소는 대체로 비쌌고, 손질해야 할 거리가 많았으며 금방 신선도가 떨어져 급하게 처리해야 하는 일이 잦다는 게 홀로 사는 이로썬 감당하기 상당히 어렵겠다는 판단이 금방 들었다. 그리고 종류의 문제도 한몫하는데, 혼자 먹을 음식으로 단일 품목의 채소 요리만 주로 할 수 있을 뿐 복잡하게 이것저것 들어가는 요리를 하기가 쉽지 않았다. 엄마는 집에 돌아온 직후 각양각색 나물들이 그득한 산채 비빔밥을 했는데, 육류보다 야채를 선호하는 엄마의 식성에 아쉬움을 느낄 때가 있었지만 이번만큼 고맙고 반가울 때가 없었다.
지난 비건 시리즈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많은 비건 제품들이 쏟아져 나오는 현실과 별개로, 비건식으로 주로 향유할 수 있는 제품들은 디저트류나 김밥 등의 간단한 대체재만 존재하는 게 이번 경험으로 더욱 아쉽게 느껴졌다. 어떤 음식이건 맛있게 먹기 위해서는 신선한 낱재료를 정성스레 손질하여 조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건 그냥 마인드의 문제려나. 어차피 이런 거 저런 거 다 따지다 보면 먹을 수 있는 건 없는 걸. 스스로를 좀 더 아끼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접하는 방식이라 생각하면 이런 번거로움쯤이야 오히려 나를 가꾸는 노력으로 치환되어 기분 좋게 느껴질까. 아, 쉽지 않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