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언어풍차 May 08. 2021

내 인생은나의 것

오랜만에 딸이 집에 온다는 소식에 좋아하는 음식을 해놓고 기다렸다. 정작 집에 온 딸은 음식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엄마, 미안한데 먼저 잠부터 자면 안 될까." 하더니 저녁 10시쯤 잠자리에 들어 그다음 날 오후 2시가 돼서야 일어났다.  

   

시험에 시험이 연속이던 학부 시절, 이 어려운 공부를 마치고 나면 환자들 진료만 보면 되겠지 했다. 그런데 하루에도 수십 번씩 환자의 차트를 들고 병원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요, 점심 먹을 시간이 없어 설익은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일이 허다한 수련의 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배가 고플까 봐 서둘러 밥을 차려주자 맛있게 먹고는 궁금증 가득한 내 얼굴을 보더니 빙그레 웃으며 그동안 병원에서 일어난 일들과 자기 생활을 주저리주저리 이야기했다. 

   

"엄마, 병원에서 일을 하다 보니 세상에는 좋은 자식들도 많지만 나쁜 자식들도 참 많다는 것을 느끼게 돼요. 얼마 전에 70대가 된 할아버지 한 분이 교통사고를 당해 구급차에 실려 왔는데, 의식이 없어 CPR로 겨우 살려 중환자실로 옮겨 치료를 받게 헸어요. 2시간 만에 나타난 자식들이 뭐라고 그런 줄 아세요.  그냥 죽게 내버려 두지 왜, 살려 놨느냐며 당장 산소호흡기를 떼어 달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항의를 하더라니까요. 너무 황당해 의사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 소명이고 만일 살릴 수 있는 사람을 살리지 않는 경우 살인죄에 해당하는 일이라고 설명을 해도 막무가내였어요. “ 



”엄마, 어이없고 황당한 일은 이것뿐만이 아니라니까요. 임종을 앞둔 환자분이 있어 임종을 보게 하려고 환자 가족들을 모이게 했어요. 임종 시간이 조금 늦어지자 왜 이렇게 안 죽느냐고 막 항의하는 거 있죠. 중환자실에서 오랜 투병 생활을 해 온 환자라 가족들 심정은 이해가 됐어요. 하지만 임종을 앞둔 부모님을 두고 이런 말은 심한 거 아닌가요? “ 한다.


”며칠 전에는 또 이런 일도 있었어요. 어느 요양병원에서 할아버지 한 분이 응급으로 실려 왔는데 얼굴과 머리는 물론 등에도 욕창이 생겨 피부가 괴사해 가고 있더라니까요. 몸을 움직이기는커녕 말도 하지 못한 할아버지가 얼마나 아프고 괴로웠을까요. 이런 환자들은 누군가가 수시로 고개를 돌려주거나 등에 욕창이 생기지 않도록 닦아 주고 방향을 바꿔줘야 하는데, 그것을 소홀히 한 모양이더라고요. “


딸은 이런 환자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이 사람들은 정말로 이런 삶을 진정으로 원하고 있을까. 누군가에 의해 원치 않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문득문득 생각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서 " 엄마, 아빠도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사전 연명의료 의향서 등록해 놓은 것이 어때요. 나도 등록해 놓으려고요" 한다.



사전 연명의료 의향서란 19세 이상의 성인이 아파서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가 왔을 때 연명 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자신의 의향을 미리 밝혀 두는 문서이다. 사실 나는 오래전부터 이 사전 연명의료 의향서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누구나 그렇겠지만 잘 살아온 것만큼 다가오는 죽음도 가족들에게 고통을 주지 않고 잘 마무리하고 싶다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내가 임종이 가까워 정신이 없거나 소통이 안 될 때 불필요한 연명 치료는 하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오래전에 펑펑 울면서 봤던 영화'미 포유'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책을 읽으면서도 삶에 대해, 고통에 대해 그리고 죽음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 보게 되었던 것 같다. 옛날에는 굳이 그런 것까지 해야 될 필요성이 있을까 했던 남편도 딸의 이야기를 듣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좋은 생각인데 딸, 우리 가족 모두 당하는 죽음에서 이제 맞이하는 죽음을 준비하는 거야. 어때" 하자 딸이 밝게 웃는다.


     

작가의 이전글 잠시 흔들려도 괜찮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