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언어풍차 Aug 17. 2021

풍경은또 하나의풍경을 만들고


우리 아파트에는 오후 한 시만 되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소리가 있다.


"땡그랑땡그랑"

오늘도 변함없이 조그만 트럭이 종소리를 울리며 아파트 단지 내를 천천히 돌았다. 천막을 친 짐칸 위에는 두부와 들기름, 참기름, 고춧가루, 청국장 등이 오밀조밀 놓여 있고  상자 안에 담긴 뻥튀기는 동동거리며 저희들끼리 키재기를 하고 있다.


처음 이곳으로 이사와 거실에서 남편과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 땡그랑떙그랑'하는 종소리가 창문을 타고 넘어왔다. 순간 잘못 들었나 내 귀를 의심했지만  연이어 들리는 소리는 틀림없이 두부장사 아저씨가 왔을 때 나는 그 소리였다. 창문을 열자 종소리와 함께  트럭 주위에는 옹기종기 사람들이 모여 물건을 사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도 아파트를 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사람이 있다니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지만 두부장사 아저씨는 어김없이 같은 시간에 우리 아파트를 찾아왔다.  나는 트럭이 올 때마다 가끔 가서 이것저것 구경을 했지만 집으로 돌아올  때는 늘 빈손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오래전에 단독주택에서 겪었던 일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남편을 출근시키고 집안 청소를 하고 있는데, 대문 벨소리가 울렸다. 대문 앞에는 얼굴이 까맣게 그을린 할머니 한분이 조그만 보따리를 들고 서 계셨다. 보따리에는 콩과 참깨가 든 비닐봉지 서너 개와 크고 작은 기름병이 들어 있었다. 할머니는 서울에  있는 아들 집에 다니러 오는 길에 여비에 보태 쓰려고 시골에서 직접 농사지은 것을 가지고 올라왔는데 서울 지리에 어두워 마땅히 팔 때가 없다며 조금만 사달라고 간절하게 부탁하는 것이었다.

할머니의 부탁을 물리치지 못하고  물건 값이 시세보다 조금 비싼 듯했지만 시골에서 직접 재배한 농산물이라는 말만 믿고 참기름과 들기름은 물론 밥에 넣어 먹을 콩도 샀다.


며칠이 지난 뒤 나물을 무치려고 참기름 병을 연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참기름은 고소한  냄새는커녕 이상한 냄새와 함께 거품이 올라오면서 보글보글 괴고 있었고, 들기름 역시 마찬가지였다. 순진하게도 나는 할머니에게 속아 엉터리 물건을 샀던 것이다.  그때부터 길거리에서 파는 물건이나 떠돌이 상인이 파는 물건은 절대 사지 않았다.


날마다 아파트를 찾아오는 트럭도 머지않아 신뢰성을 잃고 대형마트나 편의점 벽을 넘지 못하고 사라지리라 생각했다. 이런 내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트럭은 그 시간 되면 어김없이 나타났다. 한 해 두 해 점점 고객이 하나둘 늘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물건이 좋다는 입소문을 타고 트럭이  오는 시간을 기다리는 사람도 꽤 많아졌다.


이제 나도 앞집 순영 씨와 함께 두부와 청국장을 사서 먹는다. 두부는 고소하고 맛이 있었으며 청국장은 옛날 어머니가 끓여 주신 그 맛으로 풍미가 있고  맛이 깊었다. 아저씨가 직접 만들어서 판다는 말이 사실인 듯싶었다. 어느새 떙그랑거리는 종소리는 우리 아파트에 일부가 되어가고 있는 듯했다. 어쩌면 누군가는 고소한 두부찌개 먹으며 그 옛날 추억 한 자락 소환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 휴일에 세미원 연꽃을 구경한 뒤 두물머리를 산책했다. 그늘은 시원했지만 여전히 더위가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아이스께끼, 시원한 아이스께끼 있습니다."

모자를 푹 눌러쓴 아저씨가 어깨에 아이스크림 통을 메고 소리치며 지나갔다. 옛날 드라마에나 나올듯한 풍경에 한참을 넋을 놓고 바라봤다. 간혹 그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 사람도 있었다. 두물머리를 다 돌고 나오는 길에 우리는 냉기가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아이스크림을 먹다.

 

"빙빙 돌려가며 먹어봐. 어릴 때 먹었던 것처럼. 어때 더 맛있지"

다 큰 어른이 어린애 같다고 놀렸지만 나는 어느새 남편을 따라 빙빙 돌려가며 먹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들은 우리처럼 두부장사 종소리나 아이스크림 같은 잊힌  풍경들  만나 즐기는 그 과정에서  또 하나의 멋진 풍경을 만들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코로나에 갇힌 사람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