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어머니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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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 목소리에 귀기울인다는 것은 어렵다. 피해자에게 (당연히) 감정이입이 쉽게 되고, 그들에게 공감하여 가해자를 원망하게 되기 때문이다. 절절하게 이유없이 죽어간 희생자들. 왜 굳이 가해자의 상황까지 알아야 하는가. 피해자의 억울함에 비하면 가해자의 고통은 상대적으로 작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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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책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는 이 생각에 더한 깊이를 준다. 책은 99년도 '콜롬비아 총기난사 사건' 의 가해자 중 한 명의 어머니인 '수 클리볼트' 가 저자이다. 이 사건으로 13명이 죽고 24명이 다쳤다. 영감을 받은 총기난사사건이 17건이고 그 중 조승희 버지니아 공대 총기난사도 포함된다. 끔찍한 비극으로서의 여파가 크다. 단순한 총기난사가 아닌, '아이들' 이 가해자가 되어 '아이들' 을 죽인 사건인 것이다.
이 책을 공적인 가치가 높은 회고담이라고 생각한다. 가해자가 사실은 나도 힘들었어, 라고 쓴 책이 아니라
얼마나 철저히 양육에 실패했는가, 몰랐는가, 세상에 얼마나 큰 해악을 끼쳤는가, 를 진실하고 솔직하게 참회하는 심정으로 쓰여진, 세상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이고 싶다는 마음으로 쓰여진 책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사건을 처음 전해듣고 차라리 딜런이 자살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평생 그 생각을 한 점을 후회한다.
이 비극적인 상황에서 부모가 가장 먼저 보이는 반응에 대해서 서술한 초반 장면들, 이성적인 사고가 불가한 부모의 절망감이 크게 다가왔다. 저자가 끈질기게 딜런을 따라가고자 하는 부분들 또한 인상적이다.
또한 본인 변명이 아니다. 본인에게 가해진 정신적 질책, 욕설, 책망 등과 같은 부분이 나와있지 않다. 자신이 동정받을 수 있는 부분을 적기보다, 성찰에서 오는 고통. 자책의 고통에 대해 끈질기게 서술하고 있다. 저자에 대한 신뢰가 생기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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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우연을 참기 힘들다. 다시 말해, 예기치 못한 사건을 견디기 힘들다. 따라서 총기난사 사건의 경우 그 부모에게 분명히 문제가 있을 것이다, 라고 쉽사리 인과관계를 만들고 책망하기 쉽다.
범죄 보도를 어떻게 해야할까. 특히나 어떠한 것을 '피해야 하는가' 의 이슈에서, 언론의 조급증은 자극적인 보도를 만들고, 자극성은 섣부른 결론을 도출한다. 언론 보도의 알권리를 주장한다면, 과연 그 알권리가 신성한 것인지도 의문이다. 때때로 오락성을 띄는 알권리에 대하여, 선정적인 호기심 충족과 같은 대중의 위선을 발견하곤 한다. 애도하는 형태로 끔찍한 뉴스를 소비하는 것은 아닐까. 이는 언론의 문제일수도 있으며 대중의 문제일수도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적인 consensus가 조금은 성숙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 '그 사람은 그럴 법 했네' 의 사고 또한 위험하다. 그 행위를 통해서 탈출구나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환상을 심겨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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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 많은 근거를 바탕으로 가해자 2인 1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결과로 도출되었다. 에릭: 반사회적 인격장애/ 딜런: 우울증의 자살성향. 이 둘이 서로 상승 작용을 일으켜서 범행을 저질렀다. 즉 말하자면 주범과 종범의 관계라는 것이다. 실패한 히틀러과 실패한 홀든 콜필드.
딜런이 만약에 에릭을 만나지 않았다면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의 결론은 의미가 없다. 딜런 위주로 서술될 수 밖에 없었던 이 책에서, 에릭의 엄마도 분명 할 이야기가 있었을 것이다. 어찌보면 저자가 딜런의 최후의 온전한 부분을 남겨서 기억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누가 더 잘못을 했는가, 는 핵심이 아니고 중요하지 않다.
4.
한편 십대 시절을 생각 해보았을 때, 나는 부모님을 존경하고 사랑받았지만 당시 나의 문제들을 절대로 말하지 않았다. 역시나 나 자신도 위험했지만 우울한 본성적인 측면 등을 말하고 싶지 않았던 이유는, 그 문제를 엄마랑 상담을 해야지, 라는 생각 자체가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십대의 특성적인 면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모의 입장에서 아이의 방을 모조리 뒤져야 하는가. 카카오톡을 보아야 하는가. 모든 친구를 만나봐야 하는가. 만약 큰 문제가 될 확률이 1%라면 그 1% 터진 상황에서는 100%의 확률이다. 되돌아갈 수 있다면 그 일을 막기 위해선 뭐든지 해야할 것이지만, 다시 생각하면 99%는 불발인 것이다. 즉, 1%를 100%로 생각하고 계속적으로 대응하는 방식이 올바른지에 대한 의문은 있다.
어디까지 아이를 알아야 하고 어디서부터 자유를 허락해야 하는가의 확답은 없다. 사춘기 아이들의 뇌건강에 대하여 정답은 없으며, 그렇기에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자기가 자기자신을 생각해도 잘 모르지 않는가. '그 시기에는 원래 그래' 라는 식의 부모가 아이를 다 안다고 생각하는 시선과 생각이 진정한 오만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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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자를 loser, 패배자로 생각하고 살인자를 내적인 광기로 날뛰는 natural born killer로 단적으로 생각하는 시선은 잘못되었다. 자살자들은 그 고통 속에서 헤어나올 수 없기에 죽음이 무서움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선택한다. 자살은 고립감, 자기비하, 고통에 익숙함으로 인하여 하나의 세계를 없애는 것이다. 사실 자살과 살인의 내적 연결고리가 뚜렷히 보이진 않지만, 흔히 자살 충동이라고 말하는 충동은 죽고 싶은 욕구/죽임을 당하고 싶은 욕구/살해하고 싶은 욕구가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증상이기에 분명한 상관관계는 존재한다.
딜런의 그 죄가 경감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를 단순한 대량학살 사건으로만 치부한다면 해당 범죄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을 알 수 없을 것이다. 사회적인 고립감을 느끼고 자살을 하면서 타인을 해치는 방식을 택하는 범죄, '자살로서의 살인' 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15-24세 인구에서 자살률이 1위이고, 하루에 40명 자살하는 무서운 수치를 보인다. 정신병이라고 이야기하는 순간 정신병원에 가기 어려워진다. 우리가 이를 뇌건강이라고 지칭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신과에 갈 때 보험처리를 하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충분히 양지화가 되어야된다고 생각한다.
딜런은 병이기도 하지만 악이기도 하다. 굉장히 복합적인 문제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한가지 원칙만으로 판단하는 잣대는 옳지 않다. 대중의 입장에서의 '그 놈은 사이코패스', 혹은 인도적인 면에서의 '불쌍한 우울증 환자' 라고 말하는 것은 위험하다. '모든 것은 ~ 때문이야.' 로 인해 굉장히 편해지는 사회이지만 사실은 뇌가 게으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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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삶이라는 수수께끼 속에서, 순간적으로 얼마나 어둡고 비참하고 흐릿한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존재하는 사려깊음을 말한다. 철저한 실패에서 얻는 교훈, 결론적으로 정답이 없다가 결론이다. 인간이라는 모순성을 이해하는 문제에서 우리 인간은, 평생 딜레마 속에서 살아가야 하고, 또한 그것을 딜레마라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 서문 2개가 좋았다. 앤드류 솔로몬의 <한낮의 우울> 도 읽고 싶어졌다.
+) 영화 <케빈에 대하여> & 책이 자연스레 생각났다.
+) 지하실 비디오에서의 딜런과 에릭. 그 상황. 굉장히 드라이한 묘사였지만 마음이 아팠다.
+) 무엇보다도 진실한 책이었다.
(2018년의 기록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