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까지만 방황하면 되지 않을까?

이유있는 방황

by 고마워숲



“서른까지만 방황하면 되지 않을까?”


정확히 언제였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20대 중후반, 회사를 다니고 있을 때였다.




의상디자인과를 졸업했지만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고 싶어서 아동미술과외를 하며 일러스트레이션 분야의 포트폴리오를 준비하려고 했다. 하지만 서울에서 자취를 하며 월 수입 50만 원 남짓으로 살기는 사실 쉽지 않았다. 더 큰 문제는 학교 친구 소개로 하게 된 과외 지역이 내가 살던 곳에서 1시간 가까이 걸리는 곳이었고, 과외 시간이 띄엄띄엄 있는 날은 길 위에서 버려지는 시간이 3~4시간이었다. 포트폴리오 준비라는 것에 시간을 쏟기엔 이미 지쳐있는 날이 많았다. 수업하는 아이들 생각하며 버티다 안 되겠다 싶어서 6개월쯤 과외를 그만뒀다.



차선책으로 의류 디자인 회사의 그래픽 디자이너 수습사원 채용에 지원했다. 그래픽 디자인은 나중에 일러스트레이터를 할 때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그곳은 여성복 브랜드들 중에서도 그래픽 비중이 높은, 개성 있는 여성복 브랜드가 있는 회사였다. 나의 첫 사수는 꽤 좋은 분이었고,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필요한 부분들을 많이 가르쳐주려고 했다. 그 시기에 내게 내려진 과제는 디자인 상무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곤 했었다. 퇴근 시간은 늦었지만 그래도 버틸만한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회사 내부에 신규 브랜드가 생기면서 나의 사수가 바뀌고 말았다. 사수가 바뀌었다는 사실만으로, 매일같이 11시가 넘어 막차를 타고 퇴근을 하던 나는 졸지에 취미로 회사 다니는 사람이 되었고, 과제에 대한 평가는 바닥을 쳤다.

“너 아동복 가고 싶니? 유치해 완전 동대문 꺼 같아.”

사수는 뒤로 한껏 제쳐지는 의자에 거의 누운 것처럼 앉아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지금의 나보다 한참 어린 30살 정도였던 걸로 기억된다. 그렇게 독한 말을 퍼붓던 여자가 겨우 서른이었다니...)

‘그래, 이런 사수 밑에서는 더 배울 게 없겠다.’ 그렇게 4개월 만에 나는 또 일을 그만뒀다.


그즈음 대기업 남성복 브랜드에서 인턴을 하던 친구의 소개로 그래픽 업무를 다시 하게 되었고, 6개월 정도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그 회사 신입 디자이너 모집이 있어 지원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내가 당장 돈을 벌 수 있는 건 패션회사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돈을 좀 벌고 나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곳에서의 6개월간의 그래픽 업무 덕분에 인턴 면접에 합격했고, 6개월 간의 인턴 기간을 거쳐 신입 디자이너로 입사하게 되었다.




나는 당시 회사에서 새로 준비 중인 스포츠 브랜드 디자인실로 발령이 났다. 실장님은 밤 11시가 되어야 퇴근을 했고, 어쩌다 일이 있어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하면 뒤통수가 그렇게 따가울 수가 없었다. 회사에서 내게 주어진 업무는 할만했지만 당연시되는 야근으로 저녁이 있는 삶은 꿈도 꿀 수없었다. 더불어 일러스트레이터로써의 꿈은 꼬깃꼬깃 접어 마음 한 구석 깊이깊이 숨겨 놓을 수밖에 없었다. 마음 한 구석에 접어 놓은 꿈은 사람에 치일 때, 일에 치일 때마다 슬쩍슬쩍 ‘나 여기 있어! 나 잊지 않았지?’ 하며 나를 흔들어놓곤 했다. 그러다 보니 나는 회사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이것도 배워보고, 저것도 기웃거려보며 방황을 끊임없이 이어갔다.


"서른까지만 방황하면 되지 않을까? 뭐 서른 정도 되면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자리 잡겠지.”


고향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 이런저런 넋두리를 늘어놓았나 보다. 친구의 이 말이 그때의 나에게 꽤 큰 위안이 되었던 것 같다. 마치 아직은 넉넉한 유통기한을 확인받은 것처럼 안심이 되었다.




올해 나이 서른여덟.

서른에 직장생활에 대한 방황을 끝내기는 했지만 여전히 나는 방황 중이다. 나의 본질이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겠고, 하고 싶은 것은 있지만 이게 정말 하고 싶은 건지, 못 가본 길이라 미련이 남은 건지 조차도 확신할 수 없다.


그래서 누가 나에게 직업이 뭐냐고 물을 때가 참 난감하다. 디자이너였지만 지금은 딱히 디자인 업무를 많이 하지는 않고, 공예가라고 하기엔 장인정신이 부족한 거 같다.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고 싶다고 하지만 아직 그쪽으로 뚜렷한 성과도, 쏟는 시간도 턱없이 부족하다. 남편을 도와 가구 디자인을 하지만 그렇다고 가구 디자이너라고 할 수도 없을 것 같다. 아이를 사랑하지만 엄마라는 타이틀로만 내 업을 규정하고 싶지는 않고 살림을 잘 못하니 전업주부라고 할 수도 없다. 나에겐 아직 방황의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다. 아무래도 딱 마흔까지만 더 방황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