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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경애 Oct 03. 2020

청소

죽은 물건은 버리고, 혼수상태에 빠진 물건엔 생명을 불어넣는 일

시간은 목숨이야

어느 9월 초 아침, 선선해진 방공기가 막 잠에서 깬 나에게 건넨 속삼임.


시간은 즉 목숨이야.

시간이 끝나면 목숨도 끝나니까.

그리고 살아있다는 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아직 하고 싶은 일을  수 있는 기회가

남아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어가던 이가 그렇게 살고 싶어 했던 내일이라는 말, 죽음의 순간과 마주해 하루라도 더 목숨을 구걸하게 되는 건, 이제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리라. 그의 목숨이 다 했다. 그의 시간이 다 했다.


이런 생각에 이르자, 느닷없이 청소가 하고 싶어 졌다. 제일 먼저 집구석구석 처박아뒀던 물건이 떠올랐다. 언젠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버리지 못한 학창 시절 과제로 쓴 대본과 가사들. 혹시 나중에 가르치는 일을 하는 행운이 내게 찾아온다면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 모아둔 공연 대본과 핸드아웃들. 십 년 전쯤 대량 구입으로 싸게 산 볼펜, 형광펜 뭉치. 공 CD. 나이에 어울리지 않아 더는 못 입지만 엄마 선물이라 버리지 못하고 있는 원피스. 아이폰이 생긴 후 기억에서 사라진 카시오 전자사전. 몇 박스나 되는 내게서 잊힌 인형, 종이뭉치, 옷.


세 가지로 분류했다. 쓸모가 없어진 것, 쓸모가 있지만 쓰지 않았던 것, 써야 하는데 안 써온 것. 우선 전자사전처럼 쓸모가 없어진 건 버렸다. 엄마의 선물 원피스와 옷은 나에겐 쓸모가 없지만, 그 누군가에겐 기쁜 선물이 될 것 같아서 도네이션 센터로. 두 번째, 학창 시절 과제처럼 쓸모가 있지만 쓰지 않았던 물건은 바로 쓸 수 있는 만큼 쓰고 버리려고 꺼내놨고, 마지막으로 써야 하는데 안 써온 건 앞으로 내가 사용할 수 있게 눈에 잘 띄는 곳에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예를 들면 오래전에 만들기만 하고 외우진 않았던 영단어 암기카드를 책상에 올려두고 외우기 시작했다. 꽃병을 꺼내 꽃을 꽂아 식탁에 놓고, 선물로 받았던 액자에 좋아하는 그림과 사랑하는 사람의 사진을 넣어 벽에 걸고. 그러다 알았다. 왜 내가 목숨에 관한 생각을 하다 청소를 시작했는지. 나는 본능적으로 죽은 물건은 정리하고, 혼수상태에 빠져있던 물건을 깨워 생명을 불어넣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자 나 스스로에게도 생명을 부여하고 싶어 졌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내 모습이 보고 싶어 졌다. 내 손과 발과 머리와 가슴을 생명으로 꽉 채우고 싶어 졌다. 지난 십 년 동안 난 살아있었고 시간이 있었지만, 그 시간을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날 행복하게 만드는 일에 쓰지 않았다. 글 쓰고 싶었지만 대출금 갚고 세금을 낼 수 있게 해주는 회사 업무가 우선이었다. 상상 공상을 즐겼던 내 머릿속은 숫자와 세법지식으로 채워져 갔다. 회사를 위해 해야 할 일은 충실히 했지만, 나를 위해 해야 할 일은 거의 하지 않았다. 난 오랫동안 웃지 않았다. 나를 충분히 쉬게 하고, 읽고 싶어 하는 책을 읽게 해 주고, 정성껏 영양가 있는 음식을 만들어 음식 맛을 음미할 수 있는 온전히 식사만 할 수 있는 식사시간을 마지막으로 가져본 게 언제였던가. 난 살아있었지만 혼수상태에 빠져있었다. 그런데 다시 살고 싶어 졌다.


그때부터 매일 아침 나를 행복하게 할 일을 정해 하루 중 언제 어떻게 할지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아주 작지만 못했던 것부터. 오늘도 아침 7시에 무조건 30분만 쓰기. 일단 30분만 채우면 그날 목표 달성이니 31분부터는 부담이 없어지는 굉장한 효과가 있다. 아침 먹자마자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집에서 나가기. 이걸 하면 자연스럽게 운동을 하게 된다. 잠들 때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주기. 언젠가 죽음이 '너의 시간은 이제 다 했다'며 찾아올 그날, 내게 주어진 시간을 잘 써서 후회 없이 웃으며 떠날 수 있도록. 천상병 시인의 시 '소풍'처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 은 이미 끝나버린 하루에 대한 얘기지만, '보낸'을 '보내고'로 바꾸면 나머지 부분이 달라질 수 있다. 내가 헛되이 보내고 있는 오늘은 아직도 충분히 의미 있는 하루로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있는 지금 이 순간이다. 이제부터라도 '살면' 아직 늦지 않다. 조금 늦는 게 아예 시작도 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나으니까. 살고 싶다. 내 시간을 내 목숨으로 꽉꽉 채우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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