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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혁희 Aug 18. 2020

조금 긴 편지

날 위해 꺼내 보는

요즘은 쓸 일도 받을 일도 많지 않지만 손편지 쓰는 것도 받는 것도 좋아한다. 그래도 타지에 살다 보니 편지를 쓸 일도, 받을 일도 좀 더 많은 편인 거 같아 다행이라 느껴진다. 편지를 쓰는 시간 동안은 온전히 편지를 받을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전하고 싶은 소식 또는 내 마음속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다. 나에게 편지를 써주는 누군가도 그런 시간을 보냈으리라 믿기 때문에 손편지는 너무나 소중하다.


“너에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야.
나에게 하는 이야기지.
너를 핑계로 대고 내 머릿속을 마음속을 한번 털어내야 했어.
- 커피 언니의 조금 긴 편지 중

    

벽에 자리한 편지들

집에서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방에는 2018년 제주도에 온 후에 받은 친구들의 편지가 벽 한쪽에 자리하고 있다. 받은 편지들은 대부분 이 벽에 붙여두지만, 어떤 편지는 너무 길어서 붙이지 못했고 몇몇은 거실에 자리하고 있다. 그중 하나는 책상에 놓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보느라 벽에 붙여두지 못했다. 이 편지는 받은 후 몇 달 동안을 가방에 넣고 다니며 너무 많이 꺼내봐서 봉투가 너덜너덜해져 버렸다.

 

너덜너덜해진 편지봉투와 그 안의 조금 긴 편지


방의 벽과 거실, 책상 옆 등에 자리한 나의 소중한 보물들은 짧은 생일 카드부터 크리스마스 카드, 안부 편지, 간단한 포스트잇 편지, 그리고 이런저런 이야기가 담긴 몇 장이나 되는 긴 편지까지 종류도 다양하고 크기도 가지각색이다. 종종 하나씩 들쳐보며 웃고 눈물짓고 위로받으며 힘을 얻는다.



거실 책상 옆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는 퇴사 후에 받은 엽서가 자리 잡고 있다. 내가 제주도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인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에서 판매하는 사진엽서. 이 엽서를 보내준 커피 언니(내가 온라인상에서 언니를 부르는 애칭이다)도 김영갑 작가님의 사진에 담긴 제주를 좋아해 나도 언니에게 김영갑 작가님의 사진엽서로 답장을 했다. 돌이켜보니 언니에게 처음 받은 편지도 김영갑 작가님의 사진엽서였다.


커피언니에게 처음 받은 엽서


언니와 나의 인연은 3년 전에 손편지로 인해 시작됐다. 아니, 깊어졌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나는 나와는 다른 차분하고 배려 깊은 성숙한 모습의 언니가 너무 좋았고 숨기지 않고 표현했다. 그러던 중 언니가 여행을 가게 되어 나는 언니에게 조심히 잘 다녀오라는 말과 함께 길지 않은 편지를 썼고, 언니는 김영갑 작가님의 사진엽서에 답을 보내줬다.


그 후로 우리는 여러 번의 편지, 엽서, 카드를 교환했고, 언니는 나에게 속마음을 열 수 있는 몇 안 되는 유일한 친구가 되어주었다.


2018년 제주로 다시 내려온 후(2014-2017년까지 제주에 살다 육지로 돌아간 후 10개월 만에 다시 제주로 복귀했다. 다시 돌아간 육지에서 커피 언니를 알게 됐다), 언니는 열몇 장의 편지를 보내왔다. 너무 꺼내봐서 봉투가 너덜너덜해졌다는 위의 그 긴 편지. 그 후 나는 몇 달에 걸쳐 새로운 회사에 적응하며 집을 알아보고 돌아다닐 때의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 언니에게 보냈다.


2018년(왼)과 2019년(오)에 언니에게 보낸 편지 - 언니가 찍은 사진


그 이후에도 제주에 살면서 좋은 일이 있을 때도 마음 무거운 일이 있을 때도 언니에게 편지를 써야겠다는 생각부터 한다. 퇴사 결정을 한 후에도 언니에게 편지로 소식을 전했고, 그에 대한 답이 책상 옆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는 그 김영갑 작가님의 사진엽서이다.


책상에 자리한 엽서

6월, 이 엽서를 받고 한참을 울었다. 정말 많이 울었다. 그렇게 많이 운 건 너무 오랜만이었다. 불안한 나에게 뜨거운 위로를 보냈다. 엽서 한 장이 나를 안아주는 느낌이었다. 많은 이들이 그렇겠지만, 나는 특히나 다른 이에게 힘든 모습을, 불안한 모습을 보이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 내가 좋아하는 나의 밝은 이미지가 손상이라도 될 듯 정말 내가 온전히 웃는 모습을 보이지 못할 때는 잠수를 타버리는 나쁜 버릇이 있다. 나를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 많이 노력하고 고쳤지만, 여전히 그런 모습이 많이 남아있다.


그렇게 혼자만의 생각에 갇혀있던 와중에 받은 엽서였다.


예전에 내 친구가 “너는 내가 부러워하는 사람이야. 그걸 잊지 마.”라고 했는데..
그 말은 어떤 때는 힘이 되고 어떤 때는 스스로 찌르는 칼이야.
그 말에 무게를 알면서도 나는 그 말을 너에게 해야겠어.
“혁희. 나는 네가 부러워. 너도 네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생각해주길 바라."
- 커피 언니의 6월 엽서 중


언니 말대로 이 말은 무겁다. 결코 웃기만 하면서 들을 수는 없는 말이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언제나 힘을 준다. 특히나 지금은 날 응원해주는 느낌이라 고마운 말이다.


너도 네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생각해주길 바라.



생각도 많고 걱정도 많고 근심도 많은 요즘이지만

날 위해 스스로 한 선택에 후회하지 않도록

나 자신에 실망하지 않도록

다시 힘을 낼 수 있게 해주는

날 위해 꺼내볼 수 있는 편지가 있어 다행이다.


커피 언니의 편지들은 언제나 날 위로해준다.

따뜻하게 안아준다.

내가 나를 잃지 않도록 보듬어준다.


편지를 쓸 때도,

편지를 읽을 때도 그렇다.



*다른 글에 비해 이 글은 쓰는데 유독 오래 걸렸다. 솔직히 굉장히 빨리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편지를 읽고 또 읽고, 글을 썼다 지웠다 반복하다 보니 며칠이나 지나버렸다. 벽에 붙은 편지들을 매일 보며 편지에 대해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시작했는데, 며칠 동안 편지들과 너무나 소중한 시간을 보낼 수 있어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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