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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치 Aug 10. 2021

스타트업을 첫 직장으로 삼지 마세요

이게 도전인지 지옥불로 걸어 들어가는지는 알아야죠

IT업계에서 일하는 걸 꿈꾸는 학생들이라면 스타트업의 유혹이 한 번씩은 뻗쳐오기 마련이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회사들은 왠지 지원하기엔 스펙이 모자란 것 같다. 정부 지자체나 대학교에서 운영하는 창업 사업 지원 프로그램도 많고, 로켓펀치나 원티드든 뭐든 찾아보면 그래도 스타트업은 문턱이 좀 낮아 보인다. 괜히 다들 취업하고 있는 걸 보면 마음이 급해져서 뭐라도 해서 경력을 쌓으면 좋을 것 같다는 마음으로 시작한다. 그 마음은 백번 이해한다. 다들 거쳐오는 과정이고, 나 또한 그랬으니까. 첫 직장이 스타트업이었다. 직책은 공동창업자 하지만 아래의 이유들로 스타트업을 첫 직장으로 삼는 것을 추천하지 않는다. (여기서 스타트업은 당근마켓처럼 일정 궤도 이상에 올라온 기업을 의미하지 않는다.)





1. 급여가 없는 곳

젊은 패기에 의외로 가장 먼저 포기하는 게 돈이다. 다들 돈이 제일 중요하다고 하지만, 스타트업에서 부추기는 그 묘한 도전정신과 승부욕 같은 것들이 이상하게 젊은 날 고생은 사서도 한다로 귀결된다. 사람이 일을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겠으나, 기본적으로 급여가 보장되어야 다른 것들도 돌아간다. 자아실현이나 꿈, 도전 같은 것들은 생활이 가능한 수준 이후의 문제다.


찐입니다 돈 주는 만큼 일합시다 열정이 때로는 돈을 이기겠지만 (출처 : 문명특급)


급여가 없을 정도의 스타트업이라면 아주 초기단계일 확률이 높고(초기가 아닌데도 급여가 없다면 당장 도망치세요), 99%의 확률로 업무 시간도 탄력적이다. 말이 좋아 탄력적이지 사실상 24시간 일에 매달려야 하고 시도 때도 없이 업무를 봐야 한다는 뜻이다. 몸도 마음도 갈아 넣어 가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일은 하는데 들어오는 돈은 없고, 부업을 할 시간도 없고... 지치는 건 시간문제다. 열정과 좋은 동료만으로 버틸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다. 생활이 먼저다.


이때 치고 들어오는 게 스톡옵션이다.

가련한 중생들이 가장 많이 속는 스타트업 성공신화에 필수 조건처럼 따라 나오는 그 마법의 단어. 스톡옵션 좋다. 본인이 판단하기에 충분히 성공할 만한 아이템이고, 전도유망해 보여서 스톡옵션이 더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첫 직장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자. 그 누구도 스타트업을 첫 직장으로 삼는 사회초년생에게 스톡옵션을 제안하지는 않는다. 공동창업자 급이라면 모를까. (이마저도 대학교 창업지원단에 속할 공산이 크다.) 급여도 없이 미래의 가치를 약속하며 현재를 저당 잡기 위한 말이다. 급여를 받으면서 스톡옵션도 어느 정도 약속받는 것과, 무일푼으로 열정페이를 요구받으면서 달랑 스톡옵션 하나만 믿고 달리는 건 불가능하다. 거창한 단어에 속지 말자.




2. 맡게 될 직무가 본인 혼자인 곳

스타트업은 한 직무를 한 명 이하가 수행하는 경우가 많다. 기획자가 개발자가 여러 명이기는커녕, 기획자가 마케팅도 하고 개발도 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특히 초기 스타트업일수록 이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사람 구하기는 힘들고, 자리가 잡히지도 않아 증명하기도 어려운 스타트업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경험이 없는 당신이 첫 직장을 구하는데 어떤 직무든 혼자 수행해야 한다는 건, 그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다는 뜻이다. 도움은 고사하고 회사의 기반부터 업무의 규칙이나 가이드를 만들어나가면서 실무까지 처리해야 한다. 스타트업에서 성장이 빠르다고 하는 말도, 사람들이 금방 그만둬버린다고 하는 말도 이런 상황에서 많이 발생한다. 기획자가 기획만, 마케터가 마케팅만, 개발자가 개발만 하지 못하고 직무 외적인 일에 시간을 지나치게 많이 할애해야 하는 상황.


다른 회사도 겪어봤고, 직무에 대한 경험도 어느 정도 있다면 상황을 조율하며 대응해나갈 수도 있다. 어찌 됐든 무시할 수 없는 짬바라는건 여기서 티가 난다. 유난히 경력직을 찾고 선호하는 이유는 업무의 숙련도보다는 불안정하고 순발력을 요하는 경우에 즉시 투입  대응이 가능한 사람을 찾기 때문이다. 첫 직장에서 이런 일을 배우는 것도 배울 점은 있다. 일반적이지 않은 속도로 성장할 수도 있고, 그 속도에 뒤쳐져서 떨어져 나갈 수도 있다. 첫 직장에서 스타트업의 다변적인 이슈를 매번 잘 대응해나가기란 어렵다. 이를 악물고 업무에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도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놈의 죽음의 계곡 (출처 : class101)


개인적으로 신입은 너무 바쁘게 허둥지둥거리기보다는 방치당한다 싶을 정도의 여유를 가지고 업무를 배워나가는 경험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없듯이 누구에게나 교육은 중요하고, 그만큼 갖춰진 체계와 사수의 존재가 주는 안정감도 크다. 스타트업에서는 이런 과정을 겪기가 어렵다. 당장 기업이 매일 휘청거리고 투자 유치를 하러 뛰어다니는 상황에서 신입까지 챙겨줄 여유가 있는 회사를 찾기는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려울 테니까.




3. 규칙을 지키지 않는 곳


스타트업 이런 곳 아닙니다 이런 이미지도 아닙니다 (출처 : tvN)


스타트업에 가지는 낭만 중 하나가 무엇이던가. 일반 사기업에서는 찾기 힘든 자유로움, 뭔가 힙해 보이는 그런 것들이다. 스타트업의 실상과는 상당히 동떨어졌지만 2020년에 방영했던 스타트업이라는 드라마도 나름 소소한 바람을 일으켰던 걸 생각해보면 다들 왕년의 캠퍼스 로망 마냥 마음속에 스타트업 로망 같은 것들이 한 줄기씩은 있는 모양이다. 탄력적인 근무 스케줄, 수평적인 조직 문화, 자율 복장, 애자일한 업무 진행 방식 같은 것들. 어디서나 마찬가지지만 자유는 책임을 지고 행동하는 게 자유다. 책임 없는 행동은 자유가 아니라 방종에 가깝다.


초기거나 규모가 작은 스타트업일수록 규칙이 허물어지기 쉽다. 규칙을 잡아나가는 과정에서 구성원이 많지 않다면 한 명만 물을 흐려도 분위기가 상당히 나빠지는데, 누군가 총대를 메고 분위기를 잡기 쉽지 않다. 전날 늦게까지 작업을 했다는 핑계로 출근을 한두 시간쯤 늦게 하고, 다른 볼 일이 있다며 점심시간이 지나도 들어오지 않고, 업무 중간에 나가서는 깜깜무소식이고. 이런 자잘한 행동 하나하나가 분위기를 흐뜨러트린다. 오히려 대기업에서 이런 일탈 행위가 더 묻힌다. 사람이 많고 한 두 명쯤 태업을 해도 회사는 잘 돌아가니까. 조금만 철면피를 깔면 얼마든지 묻어가며 다닐 수 있다. 그러나 스타트업에서는 한 명만 저런 분위기를 만들어도 그런 분위기가 금방 전체로 퍼진다. 누구는 24시간이 모자라게 뼈를 갈아서 일하고 있는데, 누구는 놀고 있으면 의욕이 나겠는가.


규모가 커도 문제는 비슷하게 일어난다. 자유는 구성원들 간에 정해진 규칙이 존재하고, 모두가 그 규칙을 자율적으로 지킬 때만 가능하다는 걸 명심하자. 그리고 사실 스타트업이라고 되게 자유롭지도 않다





아무도 안 물어봤지만 그냥 한 번 써봤습니다 (출처 :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


프로젝트는 테스트 직전 개발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서 한숨 돌렸고, 브런치에서는 3개월째 업로드가 없다고 알림이 오던 찰나에 스타트업 취업 고민을 듣게 됐다. 너무 부정적인 얘기들만 한가득 늘어놓은 것 같지만, 사회에 처음 발을 들이는 분들이 첫 직장으로 스타트업을 고른다고 하면 해주는 솔직한 심정이다. 내가 그 불구덩이에 뛰어들었을 때도 누가 이런 것들을 얘기해줬으면 좋지 않았을까 해서. 공동 창업자였고, 디자이너로 들어갔는데 투자 PT도 뛰어다니고, 대표라는 놈은 투자 받은 돈을 개인적으로 날름 써먹고, 급여 없이 스톡옵션만 약속 받고 6개월 일하다가 모아놓은 돈도 다 까먹고 겨우 탈출했다. 이런 점들을 알고 나서도 면밀히 검토해서 그럼에도 시도해보는 것과 몸으로 부딪혀가며 깨닫게 되는 일은 다르니까.


모두가 어리고, 경험이 없지만 매력적이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떠오른 스타트업들을 성공신화라고 부르는 건 '신화' 취급받을 만큼 특수한 케이스이기 때문이다. 도전하지 않는 자에게 성공의 기회도 없겠지만, 지금 상황에 열정만 가지고 맨땅에 헤딩하듯이 도전해보라고 마냥 부추기기만 하는 것도 이 길을 먼저 가 본 사람의 도리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첫 직장만큼 사회생활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게 없다. 발을 들였어도 아니다 싶으면 냉큼 빼는 걸 두려워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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