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격호 장례식에서 본 김범석의 모습은 내가 글감으로 채택할 수 있었을 만큼 기억에 남는 일이었다.재벌가 오너들이 조문을 하는 시간에 김 의장이 나타났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당시에는 '뉴스감'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이다. 2020년 초까지 쿠팡은 불확실성 속에 갇힌 기업에 불과했다.
그러나 1년여 만에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3월 11일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한 쿠팡은 첫날 시가총액이 100조원을 넘었다. 우리 증시에서 쿠팡보다 높은 시총을 기록하는 기업은 딱 하나, 삼성전자 밖에 없다. 김 의장의 지분 가치는 10조원이 넘는다고 한다.
쿠팡의 뉴욕 입성은여러가지를 시사한다.이제는 쿠팡이 미래의 유통업을 쥐고 흔들 수있을 것같다는 예상이 힘을 얻는다. 반면 현실에 안주했던 롯데 같은 기업에겐 자칫 도태될 수 있다는 위기감을 일깨워 주었다.
그리고 또 하나. 한국 증시가 우물안의 개구리였다는 걸 새삼 깨닫게됐다. 그걸 누가 몰랐냐고? 그렇다. 알긴 알았지만 우리에게 현실 감각이 없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뉴욕 증시에 상장할 수만 있다면, 조달할 수 있는 돈의 사이즈가 달라진다는 걸 알게 됐다. 피부로 아주 많이 와 닿을 만큼.
쿠팡은 이번 상장으로 약 5조원을 마련했다. 이 돈을 활용해 먼저 국내 곳곳에 물류센터 수십개를 지을 거라 한다. 경쟁자들을 멀찌감치 따돌릴 수 있는 강력한 자본을 갖춰뒀다. 김 의장 생각대로라면 쿠팡은 물류, 콘텐츠, 데이터, AI를 아우르는 종합 플랫폼 기업이 될 수도 있다. 그는 아시아의 아마존을 꿈꾸고 있다.
이제부터는 쿠팡의 뒤를 따르는 기업이 많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당장 마켓컬리가 미국 상장을 준비하고 있다. 컬리 대표 김슬아 역시 김범석과 마찬가지로 미국에서 유학을 했고, 글로벌 컨설팅펌에서 일했었다. 미국 증시 상장으로 마련할 수 있는 자본의 크기가 훨씬 크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최근엔 야놀자 같은 유니콘 회사들도 미국 상장을 타진하고 있다고 한다.
삼성전자 같은 글로벌 초우량 회사도 미국 증시 직상장을 꿈꾸지 말라는 법이 없다.
현재 코스피에 상장돼 있지만, 미국에 동시 상장할 수 있는 제도를 이미 활용하고 있긴 하다. 한국예탁결제원에 주식을 보관하고 이를 근거로 DR(주식예탁증서·Depositary Receipts)를 발행해 뉴욕에서 거래하는 방식이다. 네이버 자회사 라인도 이런 방식으로 미국과 일본에 동시 상장 되어 있다.
대만 반도체회사 TSMC는 뉴욕거래소에 직상장 되어 있다. 글로벌 큰손들과의스킨십이 활발할 수 밖에 없다. 덕분에삼성전자보다 매출과 자산규모는 작지만 시가총액은 훨씬 크다. 4월 1일 기준 삼성전자 시총은 약 495조, TSMC는 약 700조원이다.TSMC는 뉴욕증권거래소에서 시총 1~2위를 다툴 정도로 엄청난 기업이 되었다.
우리는 이재용 부회장의 수감 생활이 끝나고, 지분 상속이 마무리되는 시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때가 되면 삼성전자도 주가 띄우기에 훨씬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게 될 것이다. 미국 증시행은 주가 상승과 자본 조달을 위한가장 강력한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 지속 가능한 글로벌 기업을 꿈꾸는 삼성전자로서는,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카드가 될 것임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