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주먼지 Dec 08. 2021

이곳에 악인은 너무 많다
「예루살램의 아이히만」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1960년 5월 11일, 우리나라가 한창 산업화의 불길에 휩싸여 있을 때, 지구 반대편 아르헨티나에서는 마치 영화 같은 첩보 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정보기관 모사드가 가명을 이용해 숨어 살던 세계 2차 대전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을 추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둠이 깊게 깔린 저녁, 길거리에서 붙잡힌 용의자에게 모사드의 요원들은 물었다.


"당신의 이름은?"


"아돌프 아이히만"


요원들은 남자를 포박했고, 그는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다. 속전속결로 이스라엘로 압송된 아돌프 아이히만은 수년에 걸쳐 역사에 길이 남을 전범 재판을 받게 된다. 여담이지만 근현대사에 그다지 잘 알지 못하는 사람(나를 포함해)에게 나치에 대해 물으면, 대부분은 히틀러와 괴벨스, 그리고 아이히만 정도를 언급하지 싶다.


그러나 아이히만이 히틀러나 괴벨스의 급(?)이었냐 하면 그건 결코 아니었다. 물론 나치 친위대의 핵심 장교였고 책임 있는 전범이었지만, 일종의 실무자이지 전쟁의 설계자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그가 이렇게까지 악명을 떨치게 된 데는 아이히만의 재판을 관찰하고 기록한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큰 몫을 했다.


당시 아이히만의 검거로 국제사회가 떠들썩 해지자, 아렌트는 미국의 교양잡지 뉴요커(The New Yorker)의 특파원 성격으로 재판을 참관하게 된다. 그리고「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쓰게 되는데(이 텍스트의 부제는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이다), 책이 출간된 후 아렌트는 유대인 사회로부터 대단한 지탄을 받는다. 한나 아렌트 본인도 독일계 유대인으로서 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인물이었음에도 말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묘사한 아이히만은 지극히 일반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예상한, 혹은 기대한 전범은 권력욕과 폭력성에 도취된 악마 같은 존재였다. 말하자면 열등감과 증오에 떨었던 히틀러는 어느 정도 그 이미지에 부합했다고 할까.


그러나 아렌트가 본 아이히만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지극히 차분한 사람이었고, 덩치도 왜소하고 얌전했다. 안경을 쓰고 느릿느릿하게 말하는 그는 심지어 근면 성실하며 일면 바람직한 사람이었다. 나아가 아이히만은 유대인 학살에 책임감을 느끼냐는 질문에 스스로를 무죄라고 주장했다.


자신은 그저 관료로써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충실하게 수행했을 뿐, 가치 판단은 자신의 역할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공무원, 혹은 군인의 가치는 복종 및 이행인데, 그것이 왜 죄가 되냐는 식이다. 사실 아이히만의 주장에 따르면 연합군의 사람들이 한 일이나 나치 독일의 사람들이 한 일이나 본질적으로 다른 점이 없다. 다른 게 있다면 한쪽은 승리했고 한쪽은 패배했다는 점뿐인 것이다.


히틀러와 처칠이라면 모르겠지만 이하 관료 시스템의 종속자인 자신의 입장에서 그것(복종)은 오히려 바람직한 일이지, 죄가 되지는 않는다는 논리였다. 실제로도 아이히만은 원래 정유회사의 세일즈 맨이었는데, 처음 나치당에 입당하게 된 이유도 친척의 권유에 따라서였다. 그다지 정치적인 뜻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생업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였던 것이다(처음엔 그랬다는 말이다).


대단히 근면 성실하고 주어진 일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아이히만은 관료제의 딱 들어맞는 인물이었다. 당 안에서 승승장구하던 그는 결국 친위대 중령(최고계급이다)의 자리까지 오른다. 전쟁 중에 아이히만이 맡았던 핵심 임무는 유대인을 수용소까지 이송하는 일이었다. 


아이히만에게 있어서 그것은 그냥 업무였다. 살인, 혹은 비도덕적 폭력의 일부라는 작업의 '성격'은 그에게 관심사가 아니었다. 뭐랄까, 그저 거대 시스템 속 톱니바퀴가 되는 것에 골몰했다고 할까? 결과적으로 전체 시스템이 어디로 굴러갈지를 생각하는 건 톱니바퀴로써는 필요 없는 일이자, 더 나아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인 것이다.


이러한 아이히만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한나 아렌트는 그가 명백한 유죄라고 선언했다. 그 죄명은 바로 살인도 전쟁도 아닌, 그보다 더 본질적인 '무사유의 죄'였다. 관료로써의 의무에 앞선 인간으로서의 직무유기라는 것이다. 관료주의의 작동방식을 떠나서, 사람이라면 자신이 속한 시스템에 무비판적으로 종속해있는 것도 죄가 된다고 아렌트는 생각했다.


사실 히틀러가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었다고 해도,  개인으로써의 그는 그저 한 명의 개인일 뿐이다. 나치가 대륙을 폐허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어찌 됐던 권위와 힘에 동조했던 수백, 수천만의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구태여 특정 정치세력을 열성적으로 지지했던 사람들만을 배타적으로 탓하는 게 아니다. 사실상 그 시스템 속에 무비판적으로 속해있었던 사람들 모두에게 유효한 선언인 것이다.


아이히만의 무죄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는 형장에서 교수되는 것으로 삶을 마감했다. 사실 최근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본인은 적극성, 주체성이 없었다는 아이히만의 주장이 거짓이었다는 증거도 많이 발견되기도 했는데, 그러나 그것은「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한나 아렌트가 말하고자 했던 논지와는 크게 상관이 없다. 


'무사유의 죄'는 비단 특수한 상황 속에 놓여있는 특정한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그 어떠한 제도와 권위 속에 속해 있든,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다면 모두 주체적 인간이라는 법정 앞에서는 유죄다. 그 제도 자체의 형태는 상관없다.


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전체주의, 권위주의에서 찾는 시스템일수록 무사유의 죄가 갖는 무게는 무거워진다. 사실 우리 사회도 그렇다. 학창 시절 혹은 사회에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복종과 수용의 미덕일 뿐, 거시적인 시점에서의 성찰은 거의 죄악에 가까운 취급을 받기 일쑤다.


수백만명의 피로써 새겼던 예루살렘의 경험을, 어쩌면 우리는 무조건적 복종의 편안함 속에서 잊어가고 있지 않을까?


어렸을 적 읽었던 동화와는 다르게, 이곳에서 악당은 괴물과 같은 형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악은 너무나 평범하게 우리 속에 섞여 들어, 이미 우리의 사고를 깊숙이 잠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조용한 새벽의 불 꺼진 방에서 문득 악(惡)의 형상이 떠올랐을 때, 용기 있게 그것의 심연을 응시했던 사람이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악의 심연 속에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 새겨져 있음을.

작가의 이전글 끝끝내 나에게로 이르는 길, 「데미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