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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먼지 Dec 03. 2021

끝끝내 나에게로 이르는 길,
「데미안」

헤르만 헤세, 「데미안」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지난한 투쟁 끝에 알을 깨고 나온 새가 날아가는 곳에는 신이 있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Abraxas).  


헤르만 헤세가 생각한 신의 형태, 압락서스는 선과 악, 자아와 물성, 남과 여 등의 속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혼종적 성격의 무엇이었다. 초월자 라기보다는 세계를 구성하는 어떤 총체적 의지라고 할까. 


「데미안」은 결국 압락서스로 향하는 구도자의 상징적 수기인 것이다. 주인공 싱클레어는 평범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소년이지만, 괜히 또래 친구들에게 하지도 않은 도둑질을 자랑하다 동네 불량아 크로머에게 찍히고 만다. 


크로머로 표상되는 악(惡)은 아버지, 가족, 사랑과 규율로 구성된 싱클레어의 유년 세계에 가해진 첫 번째 균열이라고 하겠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싱클레어를 구해준 건 신비한 소년 데미안이었다. 강렬한 첫 만남 이후 데미안은 고난의 순간마다 싱클레어의 내면적 성장을 견인하는 일종의 정신적인 지향점으로 자리하게 된다.


사실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하는 새의 이미지는「데미안」 전체를 관통하는 일종의 테마라고 할 수 있는데, 물론 그 새는 싱클레어가 되겠다. 싱클레어가 알 속에서 발버둥 치고 있는 새라면, 데미안은 도대체 무엇일까? 작중에서 묘사되는 그는 인격적 존재라고 하기엔 묘하게 초월적인 구석이 있어 보인다. 그렇다고 영적인 존재라고 하기에는 꽤나 인간적인 물성(物)을 지니고 있다. 


데미안의 정체는 작품의 주제와 바로 맞닿아 있는 지점인 동시에 많은 곡해를 받는 지점이기도 하다. 신비로운 소년 데미안은 언뜻 구원자의 형상으로 보이지만, 이는 명백한 오독(誤讀)이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있어서 타자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


베아트리체로 표상되는 에바 부인도 역시 그렇다.  베아트리체를 천상의 존재로 승격시킨 것은 순전히 단테의 순애보(?) 일뿐, 실상 그녀는 뼈와 살로 뭉쳐진 인간이었던 것처럼, 에바 부인 역시 초월적인 일자(一者)가 될 수 없다. 말하자면 데미안이 가지고 있는 무의식적 열망의 이미지화라고 할까, 자기 자신의 내면적 상징인 것이다.


에바 부인은 자신을 찾아온 싱클레어에게 이렇게 묻는다. 


"돌이켜 생각해 봐, 그 길이 그렇게 힘들기만 했니? 아름답지는 않았나? 혹시 더 아름답고 더 쉬운 길이 있었을까?"


싱클레어가 지나온 어떤 구도의 길은, 에바 부인 앞에서 비로소 과정이 아닌 온전한 의미로 승격한다. 에바 부인이 구원적 존재가 될 수 없는 것은, 싱클레어를 성장시킨 것은 그가 걸어온 길이었지, 에바 부인 그 자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싱클레어는 전쟁터에서 총탄에 맞아 치명적인 부상을 입게 된다. 난잡한 야전병원에서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다시 마주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데미안은 그에게 입을 맞춘다. 그 키스는 '에바 부인이 전하는' 키스이자, 자기 자신과의 온전한 합일이다. 


"완전히 내 자신 속으로 내려가면 ··· 거기서 나는 검은 거울 위로 몸을 숙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나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그와 완전히 닮아 있었다. 그와, 내 친구이자 나의 인도자인 그와."


죽음의 목전에서 싱클레어는 비로소 그토록 갈망했던 구도의 길, 끝끝내 자아로 향하는 기나긴 길을 완성하는 것이다. 싱클레어이자 데미안, 그리고 에바 부인이었던 한 존재가 묵묵히 걸어왔던 구도의 길은 결국, 스스로가 스스로를 완성시키는 단독자의 길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싱클레어가 소설 중반부에서 피스토리우스와 결별한 이유를 이해해 볼 수 있겠다. 싱클레어에게 압락사스의 의미에 대해 가르쳐줬던 그는, 말하자면 구도의 길 위에서 만난 친구이자 선배(?)였다.


그러나 피스토리우스의 길은 싱클레어의 그것과는 달랐다.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이자 독실한 신도였던 피스토리우스의 길은 그저 과정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었다. 모종의 종교와 체계에서 구원을 얻으려고 했던 그의 지향점은 항상 비아(非我)를 향했고, 그것은 결국 탄착점 없는 자기 순환의 오류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어렴풋하게 알아차린 싱클레어는 그에게 결별을 고했던 것이다.


그 이별 선언은 헤르만 헤세를 고전의 반열에 오르게 한 주문이기도 하며, 동시에 그의 작품세계를 꿰뚫는 주제의식이다. 결국  「데미안」이 저 자신을 읽는 모든 방황하는 존재들에게 하고자 하는 이야기도 그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길은 끝끝내는 자기 자신의 내면으로 향한다. 주어진 걸음을 묵묵히 걷는 자아가 비로소 '나', 나의 길, 내 걸음을 묵묵히 받쳐주던 심연 속의 의식과 온전히 합일될 때 우리는 스스로 존재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처음으로 돌아가서, 이 모든 구도의 여정, 태어나려는 새의 투쟁은 자신을 감싸고 있는 알의 존재를 인식했을 때 비로소 시작될 수 있다. 양수 같은 포근함으로 몸을 감싸는 껍질이 시나브로 답답함으로 다가오기 시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먼 길을 떠날 가벼운 짐을 챙길 때가 되었음을 알게 된다.


그때가 되면, 싱클레어의 이야기가 당신의 여정에 작은 등화가 되어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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