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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먼지 Nov 30. 2021

태어나서 죄송한 인간이란,
「인간실격」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태어나서 죄송합니다."


일본의 소설가 다자이 오사무는 한 줄의 글을 남겨놓고 죽었다. 생에 5번째 자살기도였다. 4번의 실패를 거치고도 기어코 죽어야만 했던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부끄러움 많은 생을 살았습니다. 


다자이의 역작 「인간실격」은 그렇게 자학적으로 시작한다. '죄송한' 탄생과 지지부진한 죽음 사이에는 부끄러운 생애가 있었다. 실격된 인간의 수기(手), 내가 다자이를 처음 읽었던 순간은 중학생 시절이었다. 도서관에서 「인간실격」을 빌려온 나를 보고 어머니는 화를 냈다. 


그때부터 마음 한켠에 다자이에 대한 애틋함이 있었다. 끝끝내 죽는 마당에도 사과를 해야 했던 사람. 그 후에 남겨진 글조차 음울하다는 이유로 비난받는 현실이 못내 미안했다.


「인간실격」의 주인공 요조가 다자이의 분신임은 분명하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 못했고, 방황의 시기에 좌익사상에 경도되기도 했으며, 약물에 중독되어 스스로를 자학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까지.


어린 요조는 사람들의 삶에 끼어들지 못해 '익살'을 연기한다. 우스꽝스러운 행동과 표정으로 사람들을 웃기는 것으로 사회로의 편입을 시도하지만, 끝끝내 그는 모종의 고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잘생긴 외모와 고독이 풍기는 낭만 탓에 끊임없이 이성의 구애를 받게 되는데, 그래도 곁에 사람이 아주 없지는 않았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하겠다.


일부러 바보스러운 모습을 연기했던 요조의 '가면' 모티브는 소설 전체를, 아니면 다자이 오사무의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개념이다.  요조는 뭐랄까, 우울하고 비극적인 인간의 전형이라기보다는 그 전형을 선망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어린 시절 이후의 삶에서 그는 자신을 둘러싼 유리한(외모, 재력, 영특함 등) 상황을 구태여 거부하고 비주류(소설의 표현에 따르면 '비합법')의 영역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건강한 생활을 할 수도 있는 상황임에도 굳이 잉여의 삶을 자처하고, 결국에는 실격된 인간의 모습으로 변모하고 만다.


사실 요조의 우울과 비극이 피할 수 없는 프리다 칼로류(類)의 고난이 아닌 것은 사실이다. 부모님께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것은 둘째 치고, 아무리 곱게 자란 몸으로 좌익사상에 경도되었다고 해서 그 정도까지 절망할 일일까, 또 애인이 겁탈당할 때 그저 지켜보기만 한 것도 어쨌든 요조 본인이 뛰어들지 않은 것이다.


일본의 작가 미시마 유키오가 다자이를 두고 "맨손 체조만 좀 했어도 치료됐을 우울증"이라며 괄시한 것도 일면 이해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실격된 인간의 수기가 읽힐 가치가 없는 심약한 넋두리라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난 요조가 솔직하고 영특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어릴 적 요조가 다른 사람들에게 느꼈던 이질감, 단절감, 그리고 합법이라는 단어에 느끼는 공포는, 분명 모든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 똑같이 자리하고 있을 법한 것이다. 요조의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가면의 모티브 역시 그렇다. 구태여 페르소나에 대한 수두룩한 철학적 용어들을 나열하지 않더라도 사람의 인생이란 일종의 가면의 연속으로 구성되기 마련인 것이다.


단지 요조는 예의 타고난 영민함과 예민함 탓에 남들처럼 그 이질감에 둔감하지 못했을 뿐이다. 


끝끝내 완수했던 자살로 표상되는 비극의 미(美)도, 누군가는 배가 부른 도련님의 자기 신세 망치기로 보일 수도 있으나(일면 그런 것도 있지만), 그것은 말하자면 거부하기 힘든 순리로 존재하기도 하는 것이다.


태생부터 타인과의 소통이 부재해 자신만의 차폐된 세상 속에서 인식을 키워갔던 요조에게, 건강과 합법, 성공, 무던함 같은 단어들이 그저 공포의 대상인 것은 당연하다.


아마 요조의, 다자이의 눈에 사회의 내부자들은 무언가가 결여된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태어나서 '죄송'하다는 그 원죄의식은 오직 스스로에게 침잠해갔던 자신과, 그와는 전혀 달라 보이는 사회의 내부자들 사이에서 느껴지는 부정교합에서 비롯하지 않았을까.


우리는 「인간실격」을, 다자이라는 스스로 실격된 인간을 덮기 전에, 비(非) 다자이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미시마 유키오가 다자이 오사무를 그토록 혐오했던 이유는 본인 내면에 있는 요조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신체에 대한 집착과 기괴한 죽음(이해할 수 없는 할복)만 봐도 그것은 분명하다.


다자이와 미시마는 마치 각자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동전과 같은 존재인 것이다. 미시마와 다자이를 극단까지 몰고 갔던 '그것', 그 불협화음, 그 부정교합, 그 가면은 비단 그 둘에만 있는 특수성일까?


그랬다면 그들이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일 리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보편적 성격의 무엇이다. 단지-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실격된 인간은 세상에게 고백했다.


"부끄러움 많은 생을 살았습니다.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사람은 없고 남은 건 다만 질문뿐이지만, 그래도 나는 애써 대답해보고 싶다.


부디 부끄러워 말길,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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