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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먼지 Nov 10. 2021

우리가 하나의 울림이라면

난 공포영화를 못 본다. 사실 보려고 한적조차 없어서 못 보는지 어떤지도 모른다. 딱 한번,  장재현 감독「사바하」를 영화관에서 봤는데, 그렇게 호러틱한 영화인 줄 모르고 들어간 거였다. 스크린이 올라가고 약 5분 후부터 난 전방 오른쪽 끝 스피커에 시선을 고정한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내 인생의 2시간은 영화관 스피커를 노려보는 데 사용됐다.


그런 나 같은 사람도 「파라노말 액티비티」를 코웃음 치며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바로 소리 없이 보는 것이다. 세상 그런 코미디도 없다. 한번 시도해보시길. 물론 그래서 얻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테지만.


사운드는 흔히들 생각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의식하지 못하지만 영화의 퀄리티를 결정적이게 결정하는 것 중의 하나가 음향이다. 영상 없이 소리만 듣는 건 가능하지만(ex라디오), 소리 없이 영상만 보는 것은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다.


생각해보면 두더지나 박쥐같이 눈이 퇴화된 포유류는 많지만 고막이 퇴화된 친구들은 본 적이 없다. 척 보기에 귀가 없는 뱀도 사실 머릿속에 있는 뼈로 진동을 느낀다. 귓구멍이 없는 거지 고막 비슷한 것은 있는 셈이다. 


인간의 세상에서 소리는 본질적으로 이질적이다. 형태가 없기 때문이다. 언어로 이루어진 세상 속에 사는 우리에게 소리는 형이상학적이다. 그래서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음악을 예술의 가장 숭고한 형태라고 생각했다. 쇼펜하우어나 니체처럼 예술을 본질으로 승격시킨 철학자들이 「예술」을 언급할 땐 주로 음악을 말한다. 쇼펜하우어는 대놓고 예술장르에 랭킹(?)을 먹이기도 했다. 


사르트르의 『구토』에서 앙투안 로캉탱은 일상적인 행위의 순간들에 구역질을 느끼면서 음악에서만큼은 그것을 느끼지 않는다. 사르트르가 쓴 것이 내가 이해한 바가 맞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소리가, 음악이 그토록 특이 취급을 받는 것은 인간의 인식구조와는 다른 층위에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 순전히 내 생각이다.


언어를 통한 재구조화를 거치지 않은 날것이라고 할까. 


로캉댕은 음악을 들으며 죽음 너머에 있는 불멸성을 언뜻 엿본다. 사물들이 인간이 부여한 의미에서 벗어나 오롯이 홀로 존재하는 걸 대면하게 될 때, 로캉댕은 구역을 느꼈다. 그러나 음악에서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선율처럼 흐르는 존재 그 자체를 음악을 들으며 감각한다.


사피아-워프 가설(Sapir-Whorf hypothesis)에 따르면 우리가 무언가를 인식할 때는 언어-문법 체계의 영향을 받는다. 로캉댕의 입장에서는 구역을 느끼지 않을 방법이 없다. 그것이 뭔들 인식되는 순간 오염되는 것이다. 그러나 소리는- 음악은 그렇지 않다.


로캉댕은 멜로디에서 불멸의 가능성을 보았고, 니체는 삶에 대한 궁극적인 의지를 감각했다. 나의 경우에는 그렇게 대단한 에피파니(epiphany)까지는 느끼지 못하지만, 음악이 대단히 도취적인 힘이 있는 건 이견의 여지가 없다. 그것은 문학이나 여타 다른 어떤 것에는 없는 힘이다. 


비극적인 소설을 읽으면 슬프고, 액션 영화를 보면 몸이 달아오르기는 하지만 그것과 음악이 주는 도취와는 다르다. 전자의 경우 이입(移入)이지만 후자의 경우 몰입()이다. 전자는 작위적인 서사구조 속으로 내 존재를 욱여넣어야 하지만, 후자는 직접적이다. 


옛 문명부터 전투에서 북소리가 중요한 이유다. 둥둥거리는 호전적인 리듬이 전사의 심장을 깨우는 것이다. 그것은 어떠한 이입도 필요 없다. 리듬, 고동, 멜로디의 공격성 속에서 폭력에 도취되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공명(共鳴)이다. 우리는 느끼지 못하지만, 모든 것은 떨고 있다. 우리를 구성하는 원자는 진동하기 때문이다. 우주는 하나의 떨림이다. 인간은 하나의 울림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진동과 공명한다. 전투의 북소리에 마음을 다잡고, 어떤 선율에 도취되어 눈물을 흘린다.


공명현상의 힘은 엄청나게 크다. 사람의 발걸음이 요행이 다리의 고유한 진폭과 공명된다면 육중한 다리는 무너진다. 그러해서 음악과 공명된 로캉댕은 육중한 죽음의 중력을 넘어선 불멸을 엿본 것이다.


그러나 각자 다른 파동이 만날 때 서로 결이 다르다면 상쇄 간섭(destructive interference)이 일어난다. 진폭이 줄어드는 것이다. 떨림의 생명력이 소진된다. 이방의 군대를 맞이해서 도열했을 때 나지막이 쇼팽의 음악이 흐른다면 패배는 따놓은 당상이다.


우리의 삶에는 각자의 진폭이 있다. 여기서 '우리'라고 함은 비단 눈 두 개 코하나 귀 두 개 달린 두발짐승만을 뜻하는 건 아니다. 로캉댕이 관찰했던 무관심의 극치인 사물 역시 저마다 떨리고 있다. 


모두는 각자 간섭하고 상쇄하고 공명한다. 재규어가 먹고 남긴 토끼를 하이에나가 먹고, 하이에나가 배설한 그것(?)들을 파리들이 먹고, 파리는 개구리가 먹고 개구리는 뱀이 먹는다. 뱀의 머릿속에 자그마한 뼛조각은 독수리의 날갯짓에 떨리고 조용히 굴속으로 스며든다. 건조한 바위 하나는 무심하게 백 년 동안 박혀있다.


그 일련의 과정은 하나의 군체()로 울린다. 하나의 선율으로, 하나의 음악으로- 생명이라는 고유한 현상으로. 순간이라는 영원 같은 울림으로-.


그 울림 속에 나는 어떤 시인이 쓴 것처럼 잔꾀만 남은 퇴화된 짐승이다. 70kg짜리 내가 움직이는데 1톤짜리 쇳덩이가 구른다. 그 1톤짜리 쇳덩이가 구르기 위해 수천 톤의 아스팔트가 흙 위에 덮였다. 그 아스팔트 위를 걷는 걸음은 흙이 떨리는 것을 감각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잔꾀만 남은 퇴화된 짐승이다.


그러나 우리의 퇴화는 얼마나 그럴듯하고 우리의 잔꾀는 얼마나 소박한지.


2012년 태양계를 벗어나 성간우주로 돌입한 보이저 1호가 바라본 지구는 하나의 점이었다. 방점처럼 찍힌 지구는 한 티의 먼지처럼 울고 있었다. 그 속에 어딘가에서 자식 잃은 부모의 어깨가 짐승처럼 떨리고 있었다. 세렝게티에 부는 바람에 눕는 풀들처럼, 얼룩말 가죽의 무늬처럼 야생의 울음을 울고 있었다. 


사람의 뇌는 압도적으로 거대(비율상)하다. 우리의 뇌 주름은 죽음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이 불러온 진화의 산물으로 꿈틀댄다. 탄자니아의 톰슨가젤은 임박한 죽음 앞에서만 발을 구른다. 하지만 나는- 수백 걸음 떨어진 스크린에 영사된 「사바하」의 귀신 앞에서 몸이 굳었다. 그들은 컷 사인 후에 종종걸음으로 뜨끈한 국이 기다리는 밥차에게 달려간 보조출연자임을 알고 있음에도-  다시 돌아오지 못할 내 인생의 2시간은 그렇게 어둠 속에 스피커를 노려보는데 온전히 사용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퇴화된 짐승이다.


그러나 그 2시간이 아깝더라도 어쩔 방도는 없을 것이다.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울음이라면. 악어 입 속의 내지르는 왜가리의 단말마처럼 열심히 우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하나의 울림이라면- 무한이라고 부를 만큼 장대한 선율 속에 방점처럼 찍힌 하나의 음계로 존재한다면- 주어진 떨림을 부산히 떨어야겠다. 


나보다 더 높은, 혹은 깊은 층위의 떨림과 공명된 삶- 니체의 표현을 빌리자면 춤추는 삶- 은 자칫 반쯤 미친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 


그리스인 조르바가 광인(狂人)으로 비치는 것은, 야생의 떨림과 공명하는, 수렴하는, 녹아드는 삶은 이미 휴먼 스케일(human scale)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퇴화는 비단 근육과 가죽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다. 어쩌면 우리의 고유한 리듬, 떨림과 울림을 비대해진 뇌와의 상쇄 간섭으로 잃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면, 어쩔 방도가 없다는 뜻이다.


그저 먹고 마시고 사랑하는 것 외에- 주어진 울림을 부산히 울어대는 것 외에- 어쩔 방도가 없다는 뜻이다. 프랑스의 시인 폴 발레리는 주어진 울음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부쩍 추워진 날씨에 몸이 떨려왔다. 그것이 칼바람때문인지 우리가 하나의 떨림이기 때문인지는 구분할 수 없었다. 다만, 떨려오니 떨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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