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주먼지 Sep 10. 2021

맹인과 코끼리

  여섯 명의 맹인이 코끼리를 더듬고 있다. 누구는 상아를. 누구는 배를, 누구는 등을. 이윽고 그들은 그것의 생김새에 대해 다투기 시작한다. 각자 전혀 다른 것을 이야기하면서 말이다. 장님이 코끼리를 만진다는 맹인모상(盲人摸象) 우화는 원래는 불교 경전 《열반경()》에 등장하는 일화다. 다투고 있는 장님들을 본 인도의 왕은 신하들에게 


“보아라. 코끼리는 하나이거늘, 저 여섯 장님은 제각기 자기가 알고 있는 것만을 코끼리로 알고 있으면서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구나."


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그런데 우화에 등장하는 그 코끼리는 사실 왕이 데려온 코끼리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옛날 인도 왕 정도 되면 반려 코끼리 한두 마리 정도는 흔히 키우는 모양이다. 과연 발리우드의 스케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예나 지금이나 여전한 건 인도의 스케일뿐만은 아니다. 상아를 만지고는 코끼리가 막대기처럼 생겼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사람이 우리 사회엔 아직 많다. 그들은 스스로에게 추호의 의심도 없다. 사뭇 비장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코끼리는 그렇게 생겼노라고 선언적으로 주장할 뿐이다.


이들은 구조적으로 행복하다. 세상이 본인 마음대로 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자신이 틀릴 일은 곧 죽어도 없기 때문이다. 억울할지언정 고통스럽진 않다. 만약 스스로가 적극적이고 정의로운 스타일인데 남들이 몰라준다고 생각된다면 실은 맹인 타입일 확률이 높다.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파악할수록 판단도 행동도 쉽기 때문이다. 


과연 세상이라는 실체가 실재하냐는 다분히 철학적인 논쟁은 일단 접어두도록 하자.


맹인모상 이야기에서의 코끼리는 하나의 세계다. 내가 알고 있는 것, 경험해본 것, 인식할 수 있는 것- 그 사고의 지평이 주관적 세계의 한계다. 그 차폐된 공간 속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그렇기에 타인과 소통한다는 행위는 실현 불가능한 일이다. 모든 이해는 오해라는 니체의 말은 끝끝내 옳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시장경제와 통신, 이동 기술의 힘은 지구를 하나의 단위로 묶었다. 필연적으로 사회의 규모적, 기능적 스케일도 유례없이 확대됐다. 말하자면 이제 킹콩만 한 코끼리를 수천 명의 맹인들이 더듬고 있는 상황이 됐달까. 재밌는 점은 비대해진 시스템 속에 잘 적응한 엘리트란 전체적인 구조를 파악하고 있는 구성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지엽적인 부분만을 세세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바람직한 인간 군상으로 추대된다. 이를테면 코끼리 발톱 전문가, 귓불 전문가, 그런 식으로 말이다.


구태여 전문직뿐만이 아니다. 공장식 분업화는 이제 사회구조적인 전제가 됐다. 그것이 무엇이 되든지 자신에게 주어진 공정만을 능숙하게 해내는 것만이 지고의 가치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맹인을 양산하는 시스템이다. 나에게 주어진 것이 코끼리의 발톱이라면, 마치 하네스를 쓴 듯이 오직 그것에만 몰두해야 한다. 그래야지 인정받을 수 있다. 당연히 눈앞에 놓인 것이 코끼리고 킹콩이고 뭐가 뭔지 알 턱이 없다.


물론 사회운영에서의 역할로 봤을 때 전문적인 역량을 가진 기술자들은 중요하다. 그들이 많은 돈을 버는 것도 합당한 일이다. 그런데 그 이상이 되면 그때부터 두 가지의 치명적인 문제점이 생긴다.


첫 번째 문제는 아무도 사회의 전체적인 구조와 흐름을 파악하고 있지 못한다는 점에서 야기된다. 2007년에 벌어졌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대표적인 예로, 당시 금융상품의 위험성을 감독했어야 했던 기관 관계자들을 비롯해 정부, 언론, 지식인들 그 누구도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재난을 예상하지 못했다. 사건 당시 사람들은 사태의 기저에 모종의 거대한 음모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이후 십여 년이 시간이 지난 지금 돌아본 그때의 광경은, 어떤 악당들의 거대한 기획이라기보다는 바보들의 합창에 가까웠다. 심지어 서브프라임 상품의 생산자들 조차도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코끼리가 날뛰면 발톱 전문가의 시야에선 그냥 온 가시범위가 흔들리는 것뿐이니까 말이다. 이는 21세기판 아이히만을 양성하기 딱 좋은 환경이다.


두 번째 문제는 그보다는 좀 더 근원적인 차원에서의 문제인데, 생업에 있어서 역할과 삶의 목적을 혼동하기 쉽다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꿈을 물어보면 보통 공무원이요, 디자이너요, 등등 비즈니스에서의 직함을 이야기한다. 직업을 소명(calling)으로써 가지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긴 하겠지만, 노량진에서 컵밥을 먹으며 불철주야 고생하는 청춘들이 공시를 소명으로 여겨서 그런 건 아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일과 삶은 전혀 다른 종류의 무엇이다. 직업이라던가, 돈이라던가 하는 것은 삶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그러나 비대해진 사회구조와 편협한 시야는 이를 역전시킨다. 마치 나의 시간, 내 인생이 어떤 역할을 쟁취하기 위한 도구인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하루에 10시간씩 노력해서 좋은 자리를 꿰차도 하루에 10시간씩 일해야 한다. 겨우겨우 경제적인 여유를 쟁취했는데 그 여유를 더 큰 여유를 위해 투자해야 한단다. 이런 이야기가 무슨 대단한 비결이라도 되는 양 베스트셀러에 오른다. 어찌어찌 노력과 운을 통해 0.1%의 여유를 가지게 됐다. 이제 시간도 꽤나 있고 돈도 많이 있다. 근데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어떤 가능성도, 지적 호기심도, 철학도, 어떤 멋진 나만의 이야기도 없다. 철학자 한병철의 표현처럼, '향기 없는 시간'만 남은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일평생 발톱만 보고 사는데, 실은 눈앞에 놓인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코끼리를 올라탈 생각이 번쩍 들리는 없다. 세계관의 확립은 무엇보다도 선행돼야 하는 이유다. 내가 어떤 일을 할까 고민하기 전에, 어떤 사람이 될지 고민하기 전에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실로 어이없는 일이다. 숨을 거둘 때가 돼서 문득 일생을 돌아봤는데, 내가 그동안 어디서 뭘 한 건지 전혀 모르겠다면, 그게 도대체 뭔가?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건 사실 우리 모두의 탓이다. 우주와 삶, 자아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을 '지겹고 쓸 데 없는 것' 혹은 중2병스러운 것이라고 치부한 건 사회 전체 아닌가? sns에서 그런 글을 본 적이 있다. 필요 이상의 고민은 시간이 해결해 준다고. 사람이 직장을 구하게 되고 자기 밥벌이를 하기 시작하면, 삶이 '심플' 해진다고. 그것이 쿨한 어른의 성숙함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그러나 실은 그것은 '코끼리는 막대기처럼 생겼다는 선언적 주장'의 변주에 불과하다. 물론 심플해지기는 할 것이다. 성숙보다는 도피의 성격으로. 뭐랄까, "다음 생에는 돌멩이로 태어나고 싶어요" 뭐 그런 느낌이랄까.


하지만 사회 분위기와 정규 교육과정이 모두 생존기술 전문가를 양성하는 것에만 집중하는 세상에서 코끼리를 생각하는 건 쉬운 일은 아니다. 우리는 어떻게 코끼리에게 등자를 달 수 있을까? 


작가 채사장은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에서 재수생 시절 선생님에게 들은 이야기를 말해준다. 어떤 선물 같은 마법적인 순간을.


별 모양 지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별 모양의 지식이 담겨진 책을 읽으면 될까요? 한 번에 읽으면 안 될 것 같으니 여러 번 반복해서 읽어보는 거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방법으로는 별이라는 지식을 얻을 수 없어요... 다른 책을 펴야 해요. 삼각형이 그려진 책. 원이 그려진 책. 이런 책들을 다양하게 읽었을 때, 삼각형과 사각형이 그려진 책, 원이 그려진 책, 이런 책들을 다양하게 읽었을 때, 삼각형과 사각형과 원이 내 머릿속에 들어와 비로소 별을 만드는 것입니다

 

정확히 그렇다. 별은 코끼리의 동의(同意)다. 어떤 생각, 어떤 지각을 얻게 되는 건 명시적인 선언문을 읽었을 때가 아니다. 별 모양을 여러 번 보아서 익숙하다 해서 그것을 알게 되는 것도 아니다. 마치 별과는 아무 관계없는 듯한 , 수많은 지엽적 부분들을 받아들이고 체화(體化)시켰을 때 그것은 비로소 융해(融解) 되듯이 이루어진다. 의식적 의도 밖에서 이루어지는 수동적 작업이다. 


코끼리의 발톱과, 코와 상아, 눈과 꼬리, 배와 등에 대한 다양한 이미지가 지각 속에서 만나게 되면, 비로소 그것은 서로 결착하며 하나의 견고한 물성()을 이룬다.


방망이 깎는 노인이 된다고 해서 뭔가를 이해하게 되지는 않는다. 공정에 익숙해진 기술자가 되는 것뿐이다. 그것은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이지만, 최종적 목적지가 될 수는 없다. 강남대로를 마후라 뚫은 bmw를 타고 폭주한다고 해도 텅 빈 삶의 공허감은 채울 수 없는 것과 같이. 영화 '비트'의 정우성처럼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소실점으로 질주하는 행위일 뿐이다. 물론 영화처럼 멋져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일관성을 추앙하는 편협한 시야에 유혹되지 말길. 그것이 증명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추천도서목록이나 '성공하는 법' 따위에도 흔들리지 말길. 


전설적인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고 했다. 수학적 언어, 물리적 언어, 철학적 언어, 심리학적 언어,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험적 언어, 그리고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언어들 까지. 지각의 넓이가 곧 세상의 넓이인 것이다.


눈을 뜨는 법은 오직 손이 닿는 대로 읽고 발이 닿는 대로 걷고 생각이 닿는 대로 사유하는 것뿐이다. 그렇게 더듬더듬 나만의 지도를 만들어가다 보면 어느 날 문득 알을 깨듯 하나의 세상을 깨고 나올 것이다. 그때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멀뚱멀뚱 서있는 코끼리가 보일 것이다. 


도달할 수 없던 소실점을 문득 지나왔음을 그렇게 알게 될 것이다. 난 그렇게 믿는다.



 


         

작가의 이전글 죽음에 대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