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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먼지 Sep 05. 2021

죽음에 대해

우리는 죽는다. 모든 게 좌충우돌 뒤죽박죽인 세상에 이 만큼 자명한 명제도 없다. 언젠가는 죽어야만 한다는 그 사실- 내가 그것을 처음 깨달았던 것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아주 어린 나이였다. 집안에서 속옷만 입고 다니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았던 때. 천방지축 뛰어다니던 내게 어머니가 말했다.


 "넌 엄마가 죽으면 어떨 것 같아?"  


어떤 맥락에 나온 질문이었는지는 모르겠다. TV 휴먼 드라마처럼  말 못 할 불치병에 걸리셨다거나 그런 건 전혀 아니었다. 어머니는 지금도 아주 건강히 계신다. 어찌 됐던, 나는 그때 처음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좀 더 정확하게는, 현현()했다. 그것은 마치 유체이탈처럼, 몸은 끝없이 침잠하고 정신은 둥둥 떠다니는 감각이었다. 엄마가 죽는다. 내가 손 쓸 방도는 없다. 사라진다. 나 역시 그러할 것이다.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존재하지 않았던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아무 말 못 하고 울었다. 죽음의 첫인상은 두려움이었다.


그 이후로 언젠간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은 내겐 일종의 풀어야만 하는 숙제였다. 벌어질 것이 자명한 그 사건과, 살아있다는 현상의 부조화를 풀어야 했던 것이다. 친구들, 가족들, 선생님들, 여타의 어른들은 아무도 그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것은 뭐랄까, 기묘한 일이었다. 마치 길거리 한복판에 꿈틀거리는 거대한 젤리 덩어리가 웅크리고 있는데 그 누구도 아는 척하거나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태연하게 걸어 다니고 있었다.


그 거대한 젤리, 그러니까 죽음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힘이 있었다. 블랙홀 같이- 그 심원한 중력은 인간의 사고가 닿는 지평선 너머에 있는 무엇이었다. 죽음이라는 전제 앞에서는, 삶의 모든 요소들은 평등해진다. 죽음을 생각할 때 우리는 모두 이방인이 된다. 그리고 당장 눈앞에 놓인 지엽적인 부분들- 이를테면 직장이라던가, 성욕이라던가- 에 정신이 팔려 죽음을 잊었을 때만 삶의 내부자가 될 수 있다.


살아있다는 것은 무언가를 지향한다는 뜻과 같다. 태어나면 배가 고프고, 그래서 운다. 그렇게 우렁차게 시작된 삶은 메이 플라워호처럼 당당하고 뻔뻔하게 나아간다. 마치 당연히 가야 되는 곳으로 간다는 듯이. 먹어야 하고, 싸야 하고, 자야 하고, 해야 한다. 그 당위(當爲)적 요소들로 삶은 구성된다. 소설가 김훈의 글처럼, 인간은 기본적으로 입과 항문이고, 나머지는 부속기관이다. 그런데 그 꼬리에 꼬리를 문 당위 끝에 기다리는 건 무(無)다. "해야 한다.. 해야 한다.. 해야만 한다.. 왜냐면.. 모.. 몰라! 죽어!" 이게 무슨 어이없는 말장난이냐는 말이다.


물론 이 핵폭탄 급 처치곤란 문제를 고민한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많이 있었다. 부처님부터 에피쿠로스까지, 아퀴나스부터 카뮈까지. 동양에서 서양, 설법에서 예술까지, 죽음의 해석을 위해 노력한 수많은 인생 선배들의 사유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체화()되지 못한 어설픈 지식으로, 고구마 서너 개를 연달아 먹고 언친것 처럼 대략 명치 쯔음에서 소화되지 못한 채 정체해 버렸던 것이다.


천재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말했다. "왜라는 질문을 할 때는, 모두가 동의하는 일련의 사실들이 있어야 한다"고. 그런데 삶의 문제에 관해서는 전제가 있을 수 없다. 그 자체가 우리 존재의 대전제이기 때문이다. 삶이 없다면? 교외의 요양병원에서 가족들의 품에 안겨 눈을 감았다. 문득 깨어나고 보니 모두 일장춘몽이었고 사실 나는 E.T가 꾸는 꿈이었을 수도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증거도 없다. 이게 한갓 장난이 아니면 뭘까?


그러나 그 사실, 고작 이게 손에 쥔 유일한 패라는 사실, 그래서 삶을 제외한 그 어떤 화두도 사유될 수 없다는 사실은, 역설적이게도 묘하게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구석이 있다. 뭐랄까, 거대한 구름이 몰려오는 것을 손 놓고 보고 있을 때 같이.


1990년, 우주를 유영하던 보이저 1호는 문득 고개를 돌려 자신이 떠나온 곳을 향해 사진을 찍었다. '창백한 푸른 점'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사진이다. 그곳에서 지구는 참깨 알보다 작아 보였다. 그러고 보이저는 다시 무한을 향해 나아갔다. 계속 나아갈 것이다. 창백한 푸른 점은 점점 작아져 마침내 원자로, 이윽고 무(無)로 수렴할 것이다. 그때 보이저는 자신의 고향을 잊는다. 그리고 고개를 돌린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곳에서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증명될 수 없다. 


이가 우리가 죽음에 대하여 인식할 수 있는 지평선이다. 통시적인 관점에서, 그리고 공시적인 관점에서 어디를 둘러봐도 지금 우리 외의 삶은 없다. 따라서 죽음은 법칙이고, 삶은 예외다. 카오스는 법칙이고, 코스모스는 예외다. 당위의 사슬로 매듭지어진 인생이 결국 무(無)로 수렴한다는 것은, 예외에서 법칙으로 나아간다는 뜻이다. 비정상에서 정상으로 이행되는 찰나 같은 순간 속에 우리가 있다. 창백한 푸른 점 속에- 


그렇게 죽음에 대한 인상은 바뀐다. 맹목적인 두려움의 감각은 이제 편안함이 된다. 살아있다는 건 다만 사망 중인 것과 다름이 아니다. 그리고 그건 그다지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시간은 묵묵히 지날 것이고 점차 늙으면 힘이 빠질 것이다. 뛰지 못하게 되고, 걷지 못하게 되고 앉지 못하게 되면 불을 끄고 누울 것이다. 점점 중력이 강해진다는 느낌 끝에 눈을 감으면 이윽고 신체조직은 와해될 것이고, 곧 없었던 것처럼 흙과 풀만 남게 된다. 여전히 시간은 묵묵히 지나고 보이저 호는 나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게 끝이다. 우리는 죽는다. 모든 게 좌충우돌 뒤죽박죽인 세상에 이 만큼 자명한 명제도 없다. 언젠가는 죽어야만 한다는 그 사실- 삶의 모든 지엽적인 요소들을 끌어안는 어떤 명제. 



넌 내일 죽는다면 오늘 뭐할 거야?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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