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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먼지 Dec 19. 2021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니까? 「피로사회」

한병철, 「피로사회」

"넌 뭐든지 이뤄낼 수 있어! 파이팅!"


몇 년째 이어온 수험생활, 고마운 친구의 응원에 마음 한편이 슬며시 아려온다. 아.. 못하면 어떡하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슬로건은 양면적이다. 실은 뭐든 다 이뤄낼 수 있는 사람은 없을뿐더러, 할 수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를 함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데 당신이 안 한 것 아니냐, 친구의 위로에는 그런 송곳이 숨겨져 있다.


「피로사회」에 따르면 그 송곳은 시대의 고유한 질병이다.'긍정성 과잉'이라는 이름의 병. 인류가 처음 뭍에 오르고 난 이후 지금껏 단 한 번도 완벽한 시대는 없었다. 어딘가에서 휘황하게 빛을 발하면 어딘가에서는 부패한 악취가 나기 마련이었다.


시대의 질병은 비록 언제나 있어왔으나, 현대의 질병은 성격적으로 지금까지의 맥락과는 좀 다르다. 지금까지 사회가 싸워왔던 상대가 바이러스와 박테리아라면, 지금 집단의 건강을 위협하는 건 일종의 신경증이라는 것이다.


이성과 협력의 힘으로 몰아냈던 외부의 적들과는 다르게, 신경증은 우리 내부에서 비롯한다. 질병, 빈곤, 무지 같은 타자적 부정성에 우리는 백신, 산업화, 교육이라는 긍정성을 처방하며 대처해왔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가 스스로를 착취하는 긍정 과잉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현대에 이르러 '성공적' 인생이란 모종의 성취와 직결된다. 그리고 그 성취는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긍정을 바탕으로 하며, 그 긍정은 '해야 한다'는 함의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오늘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죄악이며, 주어진 하루를 쪼개고 쪼개 무수한 성과과제를 구겨 넣는 것을 '알찬 하루'라고 여긴다.


원자 단위로 수량화되고 분절된 시간은 그 자체로 서사성과 존재감을 잃는다. 이 무게 없는 시간, 향기 없는 시간 속에 사는 사람들은 끊임없는 착취적 쳇바퀴 끝에 신경증과 자아분열을 앓게 된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우울증, 자살, 분열은 상당 부분 이 신경증의 증상적 발현이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그러나, 앞서 말했듯, '할 수 있다'는 말로써 하여금 성취하지 못한, 혹은 않은 사람들을 자책감에 빠지게 만든다. 신자유주의의 특별한 영리함은 소속된 개인으로 하여금 자신(제도)의 존재를 지각하지 못하게 하는 구조에 있다. 자기가 스스로 자신의 시간, 생명력, 집중력을 착취하게 만드는 것이다.


몇 년 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미생」의 주인공 인턴 장그래는 이렇게 말한다.


바둑과 알바를 겸한 때문도 아니다. 용돈을 못주는 부모라서도 아니다.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자리에 누우 셔서도 아니다. 그럼 너무 아프니까, 그래서 나는 열심히 하지 않은 편이어야 한다. 열심히 안 해서 인걸로 생각하겠다.


세상은 구조적으로 공평할 수 없고, 장그래가 열심히 했음에도 바둑으로 성공하지 못했던 것에는 분명 타고난 불리함이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장그래는 애초에 자기모순을 품고 있는 제도에 대해서 사고하지 않는다. 단지 고통스러워 할 뿐이고, 자책으로 전위시킬 뿐이다. 이 게임의 룰은 정합성이 없다.


장그래를 비롯한 우리들은 소비사회의 빛나는 우상에 눈이 멀었다. 애초에 성과(프로바둑기사, 대기업 사원 등)가 인생의 목표라는 성과중심주의의 전제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위해 주어진 시간을 분쇄시켜 버린다. '평등하지 않은..'을 운운해보지만, 성과 게임은 당연히 평등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의 적은 사실, '성공으로 이르는 길의 불평등함' 이라기보다는 '성과=성공/의무'라는 도식을 상식으로 치환 하(시키)는 피로사회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긍정의 자기 과잉으로 스스로를 착취하는 사회에 대한 처방은 어떻게 가능할까?


「피로사회」는 성과에 대한 숭배가 사라진 사회, 즉 정관()하는 사회를 제시한다. 실천적 관여의 입장을 떠나 현실적 관심을 버리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 즉 조용히 바라보고 사유하는 삶이다.


시간이 가진 고유한 향기를 음미하는 삶, 어떤 과제, 어떤 의무에 쫓기는 게 아니라 현상으로써의 세상을 오롯이 받아들이는 삶이다. 물론 계단을 뛰어넘듯이 '정관'이라는 개념을 실생활에 곧바로 적용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저자 한병철 님도 진짜로 당장 신자유주의를 폐지하자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닐 것이다.


단지 당연하다는 듯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 우리의 눈을 가리고 귀를 향해 끊임없이 울려대는 목소리, "성과, 오직 성과. 일어나서 뛰어라."


그 건방진 말에 한번쯤은 의심을 품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테다.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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