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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먼지 Dec 26. 2021

교양으로서의 과학은 왜 필요할까? 「떨림과 울림」

김상욱, 「떨림과 울림」

비록 우리는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세상에 모든 것은 떨고 있다.


북한산도, 63 빌딩도, 프러포즈를 앞둔 남자도 모두 떨고 있다.


세상은 정지해있지 않다.




"이건 과학적으로 증명됐어요!"


지하철에서 '00 환'을 판매하던 아저씨는 목청 높여서 말했다.


오늘날 과학이라는 말은 진리라는 말과 직결된다. 과학적 사고방식은 모든 분야로 진출했고, 과학자는 옛날의 성직자와 유사한 위치로 승격됐다. 이제 그것은 신성(神聖)을 해석하는 유일한, 아니면 최소한 최선의 언어가 된 것이다.


그러나 과학은 무엇이고, 비(非) 과학은 무엇일까? 철학자 칼 포퍼는 '반증 가능성'이 없는 것은 과학이 아니라고 했고, 칸트는 '과학은 정리된 지식'이라고 했다.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


만병통치약 아저씨가 뜬금없는 '과학'을 부르짖으며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아마, 00 환의 경이적인 효능은 경험적으로 증명됐다는 말일 것이다.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것, 당장 눈앞에 들이밀만한 근거가 있는 것, 말하자면 그게 과학이다. 멘델이 하루 종일 애꿎은 완두콩만 쳐다보고 있던 것도, 케플러가 졸린 눈을 부비며 밤하늘만 바라보고 있던 것도 경험적인 증거를 축적시키기 위함이었다.


경험을 일괄적으로 정리하면 모든 사례를 꿰뚫는 공통분모가 보인다. 마치 자물쇠 홈에 열쇠가 딱 들어맞듯이, 그러면 그 길이 과학적 지식이 된다.


이 말을 달리 말하면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일이 오늘 밤 벌어진다면, 그 열쇠는 순식간에 무용지물이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과학계에서 끊임없이 벌어지는 일이고, 앞으로도 벌어질 일이다. 그래서 과학은 진리를 대체할 수 없다. 과학은 위태롭고 임의적이다.


수만 년 전, 동굴에서 비를 피하던 유인원이 내리치는 번개를 보고 떠올렸던 신화의 형상도 나름의 과학적 지식이다. 그와 우리가 달랐던 것은 축적된 경험 증거의 양일뿐이다. 그가 미개하다면 우리도 미개하다. 우리가 위대하다면 그도 위대하다.


그러해서 비록 경험 증거의 집합이 진리를 대체할 순 없지만, 하나의 경향이 되어줄 순 있겠다.


오늘날 첨단을 달리는 과학이 최종적으로 내놓은 결론도 그것이다.


무명의 과학자 : 결국 우리를 구성하는 건 하나의 경향입니다. 우리는 입자이자 떨림이고, 만물의 영장은커녕 하나의 확률적인 경향입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일단 그게 사실이긴 합니다. 그럼 이만.


아무리 이해해보려 해도 잘 안 되겠지만, 어쩔 수 없다. 이제 인간은 직관을 넘어서는 경험 증거를 수집할 수 있게 됐고, 어찌 됐던 받아들여야 한다. 더 이상 감각 경험을 신뢰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은 보통의 사람들이 교양으로써의 과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된다.


이제 한 단락의 줄글이, 혹은 어떤 거대한 인격적 존재가 진리의 왕좌를 차지하고 있지 않다는 것, 대신 그 자리에 들어찬 건 매년 발간되는 200만 권의 책, 셀 수도 없는 논문 더미와 계산식의 밀고 당김 속에 형성된 간경계(間)적인 무언가라는 것, 그것들은 모두 우리가 어느 정도의 과학적 지식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빛, 시공간, 원자와 전자, 엔트로피와 양자역학, 중력과 전자기력, 우리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 TV 강연에 나온 한 과학자가 어느 낯선 학자의 이름으로 공인된 무언가를 설파할 때 사람들은 채널을 돌린다.


감각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야기는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 여길 테지만, 안타깝게도 그렇게 우리들의 세상은 좁아진다. 불분명해지고, 흐려진다.


앞서 말했듯 '과학적 사고'의 효용은 축적된 경험 증거의 질과 양에 달렸다. 얼마나 많은 반복된 경험이 있느냐에 따라 우리는 진실에 다가갈 경향이 높아진다. 뭐랄까, 이는 알고리즘의 정확성에 비유해볼 수 있겠다. 구글의 ai가 강아지나 팬케이크를 알아볼 수 있는 건 개발자들이 수천 장의 강아지 이미지를 입력함으로 컴퓨터가 '강아지'라는 개념에 근접할 수 있는 경향을 높여갔기 때문이다. 이미지가 한 장씩 축적될수록, ai의 정확도는 높아진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세상을 인식하는 경험 증거들이 반복될수록 우리를 둘러싼 것들의 본질에 가까워진다. 만권의 책을 읽은 사람 보다, 또 한 권의 책도 읽지 못한 사람보다 딱 한 권의 책을 읽은 사람이 제일 무섭다는 말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빈약한 실험조건에서는 제대로 된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것이랄까?


그러나 오늘날 인류는 감각기관의 성능을 멀찍이 뛰어넘어버리는 경험들을 수집하는 단계까지 왔다. 달리 말하면 내 먹고사는 문제에 골몰하는 것만으로는 아집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됐다는 뜻이다. 일상생활을 하면서 빛의 입자성과 전자의 운동에 대한 경험을 쌓을 일이 얼마나 있을까?


출퇴근길에 문득, 시간의 성격에 대해 깨달을 만한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 이렇게 생각해보자. 그러기엔, 기껏 해봐야 전기적 신호에 불과할 감각기관의 한계 속에서 평생을 보내기엔 인생이란 너무 소중한 것이다. IMAX로 제작된 영화를 무성 흑백 필름으로 관람하기엔 너무 아쉽지 않을까?


조금만 눈을 돌려봐도, 동네서점까지만 걸어가도, 가장 똑똑한 부류의 사람들이 수백억 원의 돈과 수년의 시간을 갈아서 비로소 습득할 수 있었던 경험 증거가, 그것도 몇 개씩이나 꽉꽉 들어차 있는 보물이 잠들어 있다. 치킨 한 마리 시킬 돈만 지불하면 그 경이로운 경험들이 오롯이 내 것이 된다.


나는 나를 둘러싼 이 사회가 그런 경험 증거들에, 그런 다채로움과 경이로움에, 반짝이는 밤하늘과 꿈틀대는 완두콩에 참을 수 없이 유혹되는 곳이기를 간절하게, 정말 간절하게 바란다.


저자 물리학자 김상욱 님은 그러한 세상의 경이에 도취되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내가 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tvn의 교양 예능 「알쓸신잡」에서였다. 대단히 안온한 인상과 조용조용한 말투와는 다르게 모종의 내공이 느껴지는 말투가 인상적이었달까. 그러나 그 내공은 학자로서의 권위가 아닌 세상에 대한 애정이었던 것이다.


「떨림과 울림」에는 '물리학자가 바라본 우주와 세계 그리고 우리'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물리학의 시선은 차갑고 분석적이며 계량적이지만, 물리학자의 시선은 따듯하고 온정적이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게으름 섞인 흐린 눈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 최선을 다해 관찰하고 생각하는 것- 나는 그것이 스스로에 대한, 그리고 세상에 대한 사랑의 최종적 형태라고 믿는다.






비록 우리는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세상에 모든 것은 울고 있다.


완두콩도, 궁수자리에서 묵묵히 빛나고 있는 K형 거성 누샤바도, 저녁 6시 만원의 지하철에서 홀로 고요히 독서하는 사람도 모두 울리고 있다.


세상은 정지해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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