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도 없다
<나 혼자 산다>는 리얼 관찰 예능을 표방하며 대한민국 예능판에 혜성처럼 나타났다. 현재까지도 이러한 관찰 예능이 대한민국 예능판에 주류로 자리잡고 있다는 점에서 <나 혼자 산다>는 한국 예능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프로그램임에 틀림이 없다.
노홍철, 김광규, 김태원 등으로 대표되는 1기, 육중완과 김용건 등이 합류한 2기를 거쳐 그 포텐셜이 만개한 전현무, 박나래, 기안, 이시언, 성훈, 한혜진의 3기에 이르러서는 MBC올해의 예능 프로그램상과 전현무, 박나래의 대상 등으로 그 전성기를 맞았다.
하지만 전현무와 한혜진의 하차, 박나래와 기안의 논란, 이시언의 하차. 최근엔 제작진의 삽질이 이어지며 프로그램의 화제성이 예전만 못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기안 역시 시상식에서 이를 직접적으로 언급했을 정도. 많은 이들은 이를 여러 논란이 중첩된 결과라고 이야기하지만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물론 논란이 이어지며 대중들에게 상당한 피로감을 준 것 또한 맞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따로 있다. 멤버들의 캐릭터가 소모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무한도전>, <1박2일> 등의 리얼 버라이어티가 예능의 주류로 떠오르며 <캐릭터>는 예능판에서 가장 중요한 출연자의 아이덴티티가 되었다. <개그콘서트>와 같은 공개 코미디 혹은 <X맨>이나 <공포의 쿵쿵따>와 같은 스튜디오 예능이나 토크쇼에서는 매주 같은 포맷으로 녹화를 치르다보니 출연자가 스스로의 진짜 모습을 보이기 어려웠기에 캐릭터는 촬영 당시에만 사용되는 일종의 가면이었다. 하지만 매 주 어떠한 상황 속에 던져질지 모르는 리얼 버라이어티 예능 현장에서는 출연자들이 당황하는 모습, 화내는 모습, 어이없는 모습 등 그야말로 날것 그대로의 모습이 화면에 담기며 캐릭터와 출연자가 구분되지 않고 하나로 여겨지게 되었다.
공개코미디 출신 예능인들이 리얼 버라이어티 초반,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 여기서 기인한다. 그들은 대본을 통한 희극 ‘연기’에 익숙했기에 자신을 솔직히 드러내는 것에 익숙하지 못했고, 카메라 앞에서 어디까지 드러내고 어디까지 연기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던 것이다. 이수근, 정형돈 등의 공채 희극인 출신이 헤매는 동안 아닌 길바닥(…) 출신인 노홍철이 두각을 드러낸 데에는 이유가 다 있었던 것. 오히려 자신을 화끈하게 오픈해 버리니 자연스레 캐릭터가 생겼던 것이지만, 대본대로에 익숙하던 정형돈이나 정준하, 이수근은 그렇지 못했던 것. 안그래도 당황스러운데 매 주 재미없다고 욕먹으니 아마 더욱 자신감이 떨어지지 않았을까.
어쨌든, 그만큼 캐릭터는 지금 예능판에서 중요하다. 그리고 이는 <나 혼자 산다>에도 정확하게 부합한다. <나 혼자 산다>는 관찰예능을 표방하고 있고, 꽤 오랫동안 리얼 버라이어티의 방식이 아닌 관찰의 방식으로 프로그램을 이끌어 왔지만, 결국 전성기를 맞은 건 멤버들 각자가 명확한 캐릭터를 가지고 리얼 버라이어티 형식으로 캐릭터쇼를 시작한 이후였다. 역설적이게도 멤버들의 연결성이 강화되며 ‘혼자 사는’ 일상이 아닌 ‘함께 노는’ 일상을 보이기 시작했을 때 프로그램은 최전성기를 맞을 수 있었는데 이러한 선택을 통해 <나 혼자 산다>는 관찰 예능의 탈을 쓴 리얼 버라이어티 예능으로서 기능하게 된다.
이 때의 출연자와 그 캐릭터는 다음과 같다.
전현무 - 메인엠씨, 큰형, 전 회장
박나래 - 서브엠씨, 기안의 썸녀, 나래바 박사장
기안84 - 나래의 썸남, 세얼간이 둘째
이시언 - 투덜이, 세얼간이 첫째, 츤데레
성훈 - 착한 형/오빠, 세얼간이 둘째, 허당
헨리 - 막둥이
한혜진 - 쎄보이지만 착한 누나/언니, 허당
이 때의 캐릭터들은 각자가 다른 캐릭터들과도 긴밀하게 엮여 있었기에, 다양한 조합으로 특집을 선보이며 모범적인 캐릭터쇼를 선보일 수 있었다. 박나래 - 기안 조합은 베스트커플상을 수상했고, 세얼간이는 홍콩 편에서 대박을 터트렸으며, 전현무와 한혜진 역시 실제 연인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현무와 한혜진이 결별하며 나란히 프로그램에서 하차하며 메인엠씨의 역할이 당시 이제 막 포텐셜을 터트리고 있던 박나래에게로 옮겨갔으며,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박나래와 기안의 썸남/썸녀 캐릭터가 사라지게 된다.
썸남/썸녀 캐릭터는 사라졌지만 <나 혼자 산다>는 세얼간이 여름특집, 여름 시언 학교 등 세얼간이 캐릭터를 중심으로 프로그램을 재편한다. 또한 다른 돌파구를 찾기 위해 박나래의 나래바 박사장 캐릭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된다. 이렇게 탄생한 또다른 캐릭터 쇼가 <여은파> 였지만 이 시도는 여러 삽질이 겹치며 장렬히 산화(…)
여하튼 여러 방면으로 새로운 시도를 통해 프로그램의 화제성을 유지하려 했지만 …
<나 혼자 산다>의 추락이 시작되는 시점은 개인적으로는 박나래의 성희롱 논란부터라고 본다. 이 때를 기점으로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나드는 유머를 구사하던 박나래의 캐릭터인 ‘나래바 박사장’을 이전처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논란의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이는 <나 혼자 산다> 매우 큰 손실이었는데, 이 때가 이시언의 하차 이후 매우 어수선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멤버 모두와 케미를 이루던 이시언은 <무한도전>의 정형돈, 하하의 포지션과 유사했다. 적절한 진행감을 갖췄고 예능감도 훌륭했기에 그는 메인엠씨의 부담을 덜어주면서도 어디로 튈 지 모르는 기안을 적절히 제어했다. 때로는 공격하며, 때로는 자신이 공격을 받으며 기안의, 혹은 다른 멤버들과의 웃음을 극대화하던 이시언이 사라지자 당장 기안은 조심스러워지기 시작했으며, 성훈은 예능감에 있어서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 이를 제어해야 할 멤버는 박나래였지만 이 상황에서 어찌어찌 굴러가던 와중 성희롱 논란이 터져버린 것.
이로 인해 박나래와 <나 혼자 산다>는 엄청난 비난을 받음과 동시에 박사장 캐릭터를 포기해야 했다. 선을 넘나드는 ‘야한 농담’이 그 아이덴티티이던 박사장 캐릭터를 바로 그 지점에서의 통제에 실패한 박나래가 다시 사용하기에는 리스크가 너무나 컸다. 결국 박나래는 기안과의 썸 캐릭터에 이해 박사장 캐릭터가 사라지자 당장 사용할 수 있는 캐릭터가 사라졌으며, 이는 아직까지도 <나 혼자 산다>에서 박나래의 쓰임새가 애매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메인 엠씨 박나래의 논란 이후, 제작진은 급하게 전현무를 복귀시키고, 키를 레귤러로 투입하며 새로운 케미스트리를 만들려 하고 있지만 별다른 효과는 보지 못하고 있다. 전현무는 과거 전성기의 폼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고(혹은 조심스러워 하는 것으로 보인다) 키는 다른 예능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캐릭터를 밀고 나가고 있지만 아직 케미가 만들어지지는 않고 있으며 오히려 몇 번 소소한 논란이 일기도 했다. 유일하게 꾸준히 웃음을 뽑아내던 기안 역시 점점 더 조심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이며 과거의 엉뚱한 모습의 빈도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
이시언의 경우, 본인 역시 기안과 마찬가지로 ‘얼간이’라는 점을 이용하여 서로 투닥거리면서도 절대 선은 넘지 않았고, 선을 넘었다면 곧바로 사과하고 공격도 잘 받아주는 모습으로 웃음을 만들었지만 현재 그 역할을 하고 있는 전현무의 경우 본인부터가 워낙 넘사벽의 엘리트인데다가, 과거 비호감 논란이 여럿 있어 이시언처럼 과감하게 기안을 제어하지 못하고 조심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박나래는 여전히 본인 스스로가 조심스러운 듯 보이며, 그 외의 멤버들은 아직 본인 앞가림에도 벅찬 듯 하다.
결국 이시언의 하차 이후 프로그램을 전체적으로 이끌고 조율했어야 할 박나래가 논란에 휘말리며 프로그램에서의 영향력이 제한된 스노우볼인 것으로 보인다.
키의 경우, 이미 다양한 예능을 통한 본인의 캐릭터가 구축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똑부러지는 동생 키와 엉뚱한 형 기안이라는 정석적인 케미스트리를 염두에 둔 투입으로 보이지만 아직까지는 둘의 상극인 성격만 부각되고 있으며 몰카 논란으로 시선이 싸늘해진 탓에 세얼간이 급의 확실한 케미를 구축하기 위해선 시간이 걸릴 듯 보인다.
현재 제작진은 다시금 초심으로 돌아가 ‘관찰 예능’에 조금 더 집중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무지개 라이브의 빈도가 늘어났고, 억지로 멤버들을 엮어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내려는 시도는 줄어들었다. 매 년 관심도도 높았고, 나름 야심차게 준비한 달력 특집이 생각보다 부진했던 것도 영향을 준 듯 한데, 이로 인해 아무래도 자연스럽게 다시금 멤버들의 케미스트리를 정립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러 논란들로 인해 낮아진 관심도와 높아진 피로도를 가지고 있는 <나 혼자 산다>에게 그 정도의 시간이 주어질지는 지켜봐야 할 듯하다.
다시금 전성기의 폼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전현무보다도 박나래가 캐릭터를 회복하는 것이 필요해 보이며, 키와 기안의 케미스트리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해야 할 것이다. 활용도가 애매해진 화사나 성훈의 쓰임새는 제작진이 고려해보아야 할 듯하다.
지금까지 <나 혼자 산다>에 대한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써 보았다. 개인적으로는, 군대에 있을 때도 항상 다시보기로 볼 만큼 매우 좋아했던 프로그램인 만큼, 다시금 예전의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진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