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가 인터뷰 1
“마음속에 항상 부채감이 있었어요.”
가을의 끄트머리인 11월 3일, 은퇴 활동가로 뜨고 있는 용산구 거주자 이철로(63)씨를 만났다. 이철로씨는 항만 기술사(기술자보다 등급이 높은 전문가)였다. 회사를 다니며 겸임교수로 6년간 활약을 했다. 하지만 그는 늘 마음의 빚이 있었다. 가정을 꾸리고 책임지느라 사회변화를 위한 활동을 이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 60세가 되자 드디어 은퇴를 했다. 몸은 자유가 됐지만 마음은 가시방석이었다. 어디에 마음을 붙일까 고민하던 차에 노회찬 의원이 돌아가셨다. 누군가의 죽음이 핑계가 돼서는 안 되지만 이철로에게 노회찬의 죽음은 남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더 이상 정당활동을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2018년 10월 정의당에 입당했다. 그리고 석 달 후, 용산시민연대에 회원으로 가입했다. 회원이 되자마자 '한남공원 지키기 시민모임'을 발족했다. 그 모임의 간사가 되었다. 한남공원을 지키는 것은 실로 중요한 문제였다. 2020년 7월 1일 시행되는 도시공원 일몰제가 코앞에 닥쳤기 때문이다.
한남공원 부지는 1940년 3월 12일 조선총독부 고시를 통해 ‘보통공원’으로 지정됐다. 그곳은 이미 80년 전부터 공원부지였던 것이다. 그러한 공원부지가 공원이 될 수 없었던 이유는 1951년부터 주한미군의 부대시설로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서울환경운동연합과 용산시민연대 등의 사회단체, 시민들은 한남공원을 지키기 위해 내 일처럼 발 벗고 나섰다. 결국 4월 23일 서울시보 제3580호를 통해 한남공원의 부지 전체를 서울시의 주도로 공원화하겠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철로 활동가와 주민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엄청나게 기뻤어요. 시민사회단체 활동을 하는 이유는 사회변화를 위한 것도 있지만 활동하면서 연대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게 가장 커요. 서로 믿고 공감하고 동질감이 생기고. 이 동질감이 오래가야 다른 문제가 생겼을 때 뭉칠 수 있거든요. 만약에 한남공원 찾기가 잘 안 되었어도 함께한 주민들과 연대감을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성공한 거라고 생각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우리가 이긴 거예요.
한남공원을 되찾은 일은 삼박자가 잘 맞았어요. 능력 있는 간사(저, 웃음)와 구의원(설혜영), 그리고 뜻을 모은 시민들이 잘 뭉쳤기 때문이에요. 그때 함께한 사람들이 2천 명이에요. 밴드를 만들었어요. 밴드에 가입한 회원은 200명 정도 돼요. 생태환경 정보를 교환하고 한 달에 한 번 모여서 환경과 생태에 관한 공부를 하고 있어요. 지금은 코로나19 때문에 못 만나서 슬퍼요.”
한남공원이 다시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나도 기뻤다. 되찾는 과정에서 서울시와 용산구가 비용 문제로 옥신각신하기도 했다. 한남공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보통공원’이기 때문에 없어지면 안 된다는 서울시의 의지가 컸다. 결국 관할구인 용산구도 비용을 부담하고 공원을 되찾기로 한 것이다.
이철로 활동가가 말했듯이 혼자였거나 하나의 시민단체로만 움직였다면 못 했을 일이다. 삼박자를 잘 맞췄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얼마나 기쁘고 뿌듯했을까. 인터뷰 도중 다시 한번 축하를 전했다.
“은퇴를 했지만 여전히 돈 들어갈 일이 있어서 일을 해야 했어요. 용돈도 벌어야 하고(웃음). 운전하는 것에 자신이 있어서 택시를 몰려고 택시기사 자격증을 땄어요. 그런데 한남공원 지키기 간사로 활동을 하다 보니 택시를 몰 수가 없어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니까. 할 일이 너무 많았어요. 현수막도 주문해서 걸고, 유인물도 한남역 앞에서 혼자 나눠주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저를 주민들이 불쌍하게 여겼는지 한 분, 두 분 도와주기 시작했어요. 공원 지키기 서명을 받고 나서 보니까 2천 명의 시민들이 참여했더라고요. 감동이었어요.”
오랜 직장생활을 끝내고 은퇴를 하면 자유를 만끽해도 모자랄 때다. 이철로 활동가는 어떤 이유로 다시 활동가의 삶을 선택했을까. 그 사연이 무척 궁금했다.
“저는 유신시절에 대학교를 다녔어요. 학생운동을 안 할 수가 없었어요. 학교에서 거의 전설이었어요(웃음). 주동자였으니까. 그때는 유신시절이어서 모일 수가 없잖아요. 모이기만 해도 구속이니까. 중국집, 다방, 친구 집에서 몰래 모였어요. 그렇게 활동하다가 결국 졸업을 못 했어요. 그리고 공장에 취업했어요. 위장취업이었죠(웃음). 그러다 갑자기 가정을 꾸려야 해서 결혼을 했어요. 87년 6월 항쟁이 터지고 현장을 떠났어요. 굳이 내가 없어도 되겠다는 생각을 한 거죠. 한 학기가 모자라 졸업을 못 했는데 나중에 복교령이 떨어져서 겨우 졸업했고요. 후배들에게 맡기고 떠난 게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어요. 언젠가는 갚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살았는데, 도무지 기회가 생기지 않았어요.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가 은퇴하기 3년 전부터는 부산에서 일했어요. 사무실 근처에 있는 환경단체 간판이 보였어요. 찾아갈까 하다가 용기가 없어서 못 갔어요. 그때는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를 매주 할 때였어요. 서울에 가고 싶어서 엉덩이가 들썩거렸죠. 가끔 집회 참여하러 서울에 가긴 했지만.”
마음의 부채감을 덜기 위해 시민사회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그 선택은 예고된 과정이었다. 이철로는 일찍부터 반골 기질을 숨기지 않았다.
“대학 때, 현대사상의 비판이라는 과목을 들었어요. 공산주의의 가치관에 대해서 쓰라는 시험을 봤어요. 저는 공산주의에 대해서 긍정하는 답을 썼거든요. 교수의 입장에서는 공산주의를 나쁘게 써야 하는데 좋게 쓰니까 사상이 불순한 놈이라면서 몽둥이로 때리고 강의실에서 쫓아냈어요. 그리고 신고한다고 했어요. 그 일 때문에 집안이 발칵 뒤집혀서 아버지가 교수에게 싹싹 빌었어요. 아버지는 교수를 설득해서 저를 군대에 보낸다고 하고 교수는 저를 군대에 보내지 말라고 했어요. 군대 가면 바로 적색분자 되니까 자기에게 맡기라고. 자기가 교화시킨다고. 그 일이 있고 난 후, 교수에게 머리를 숙였어요. 더 나대면 식구들에게 피해가 갈까 봐. 생각하면 정말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죠. 몇십 년 지나고 같이 수업 들었던 친구들이 그때 저를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아버지가 공무원이어서 자유롭게 활동을 할 수 없었다. 본인 때문에 아버지 직업에 문제가 생기면 그 파장은 고스란히 가족들에게 미치니까.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답답했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친구들과 몰래 모여서 학습을 했다. 당시에는 국문으로 된 학습서가 많지 않아서 영문 책을 번역해가며 활동의 지침서로 삼기도 했다.
이철로 활동가는 요즘 또 다른 일에 발을 담갔다. 용산구에 노동권익센터를 만드는 일이다. 지난 5월 10일 강북구의 한 아파트에서 경비노동자가 주민의 갑질을 견디지 못하고 숨진 일이 있었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시작한 일이다. 서울시 각 자치구에 의무적으로 만들어야 하는 노동자종합지원센터가 용산구에는 없다. 요즘 이철로 활동가는 발이 부르트도록 지역의 경비노동자와 비정규 노동자를 만나러 다닌다. 이번에도 ‘간사’ 역할을 맡았다. 은퇴 후 활동이 다시 대학 새내기로 돌아간 것처럼 설레지만 빡세기도 하다.
“다른 구에는 다 있는데 용산구에만 없으면 안 되잖아요. 경비노동자에게 자주 생기는 갑질 문제, 초과노동, 휴게시간이 없음 등의 슬픈 현실을 지원해 주는 조직이 필요해요. 경비노동자뿐만 아니라, 비빌 언덕이 없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무척 필요한 센터예요. 문제가 생기면 어디에 하소연해야 할지도 모르고, 도움을 요청하고 싶어도 방법을 모르니까요.
문제는 이 센터를 노동자 중심의 철학을 가진 사람들이 운영해야 하는데 구청에서 직영으로 운영하려고 해요. 그러면 노동자를 위한 센터가 아니라, 공무원들이 전시행정으로 운영할 우려가 있거든요. 그래서 지역 시민사회단체나 노동조합이 운영할 수 있도록 발판을 만드는 거예요. 노동조합이나 사회단체들이 함께 이 센터를 운영할 여건을 만들어야 하는데 다들 바빠서 적극적으로 합류하지 못하고 있어요. 그래도 해봐야죠.”
은퇴 후에 지역 활동을 이렇게 활발하게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본인의 건강과 경제적 문제, 가치관, 시민사회에 열린 자세 등이 일치해야만 가능하니까. 이철로 활동가는 이 조건을 모두 갖추었다면서 스스로를 높이 평가했다. 일종의 자화자찬이지만 얄밉지 않았다. 그에게서 권위적인 모습을 찾기 힘들어서다.
“직장 생활할 때는 접대하고 술 마시고 거래처 눈치 보고 그렇게 살았어요. 사는 의미도 못 느끼고 소외감이 많았어요. 요즘은 하루하루가 너무 소중하고 할 일이 많아요. 말과 행동에 더 신경 쓰고 조심스러워요. 만날 사람도 많고 공부해야 할 것도 많고. 시간이 금쪽같아요.
‘유럽이나 선진국에서는 은퇴 후에 NGO 활동을 많이 한대요. 그러니까 선생님처럼 의식 있고 건강한 분이 활동해야 해요.’라는 지역활동가의 꼬임에 넘어갔어요(웃음). 활동해보니까 제가 배우는 것이 더 많아요. 저 같은 은퇴자의 사회활동 사례가 고령사회의 노후 활동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커요. 동네에 코로나19 때문에 재능이 있어도 일을 중단한 제 나이 또래인 분들이 있어요. 그분들 만나서 맛있는 음식도 사주고, 술도 사주면서 꼬시고 있어요. 사회활동 많이 하시라고(웃음). 한남공원 지키기 활동할 때 함께 했던 분들이에요. 적극적으로 활동하지는 못해도 지지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맙지요.”
일찍부터 사회운동에 눈을 뜬 사람이라서인지 고민을 이어가려는 의지가 컸다. 은퇴 후 활동을 주위 사람에게 전파하려는 노력까지 하고 있으니 말이다. 젊은 시절의 문제의식을 나이 들어서까지 가지고 있고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런 모습은 옆에 있는 활동가들에게 큰 울림을 준다. 자칫하면 ‘꼰대’가 되기 십상이지만 꼰대가 되느냐, 아니냐는 끊임없는 ‘자기 성찰’에 달렸다. 이철로 활동가는 ‘권위없음’이 몸에 베었다. 굳은일을 도맡아 하고 젊은 활동가들과 잘 융합하고 있다. 같이 일하는 활동가는 ‘형님과 일하면 손발이 척척 잘 맞는다’고 한다.
이철로 활동가를 보면서 나는 저 나이가 되면 어떤 모습일까? 후배 활동가들이 같이 일하고 싶어하는 품위 있는 사람일까? 다른건 몰라도 철은 좀 들었기를. 후배들을 위해 지갑을 여는데 인색하지 않기를.
“은퇴하면 1년에 한 번씩 태국에 가는 게 꿈이었어요. 그런데 이제 용돈도 못 벌고, 벌여놓은 일은 많고, 노는(?) 형님들 술도 사주려면 그 꿈은 접어야죠. 지금 하는 일이 태국여행하는 것보다 더 값지고 보람된 일이니까.
아참! 얼마 전에 용산구청장이 부동산 투기를 위해 건물을 샀다는 기사 보셨죠? 그거 때문에 기자회견 준비해야 해요. 말년에 일복이 터졌어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