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희망씨' 사무국장 김은선 인터뷰
▲ 활짝 웃으며 인터뷰하고 있는 김은선 ⓒ 문세경
"20대 초반에는 노동조합이 뭔지 노동운동이 뭔지 잘 몰랐어요. 그때를 생각하면 부끄러워요."
두어 달 전에 지인의 집에서 '아이들과 희망을 나눠요'라고 적힌 연두색 하트모양 저금통을 보았다. 저금통의 출처를 물으니 '네팔에 있는 아동을 돕기 위해 희망씨라는 단체에서 모금하는 것'이라고 했다. 마침 주머니에 현금이 있길래 '술 한번 덜 먹자'는 생각으로 돈을 구겨 넣었다. '희망씨'는 어떤 일을 하는 곳일까? 보나 마나 고생하는 활동가가 있을 것이다.
5월 21일, 사단법인 '희망씨'에서 사무국장으로 있는 김은선(48)씨를 서울시 성북구 종암동에서 만났다. 처음 보는 사람임에도 낯설지 않고 친근감이 드는 모습이었다.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사람처럼 해맑은 미소로 필자를 맞았다.
"전라도 무안군에서 태어났어요. 네 살 때 서울로 올라갔다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다시 시골로 내려갔어요. 아버지가 염전에서 일을 하시며 가족을 부양했어요. 서울에 있을 때, 이사를 많이 다녔어요. 집안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고, 이사를 많이 다녀서 친구가 별로 없었어요. 공부만 하는 아이였어요. 공부를 잘해야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고등학교는 목포로 유학을 가서 혼자 자취하며 보냈고요. 서울로 대학을 가려고 공부만 했어요."
김은선의 꿈은 '선생님'이었다. 좋아하는 수학 선생님을 만나서 수학, 과학을 잘했다. 고등학교 때 입시 상담을 했던 선생님은 광주교대를 권했지만 서울로 가고 싶은 그의 욕망을 꺾을 수 없었다. 결국 A대학교 공대에 합격해 그토록 원했던 '서울 입성'을 이뤘다.
수학이 재미있었지만, 공대 졸업 후의 진로는 그와 맞지 않았다. 대학 다닐 때, 야학교사로 활동하면서 사회복지사가 되고 싶었다. 그러려면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를 해야 한다.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자리를 찾던 중, 취업 박람회에서 학습지 교사 일자리를 만났다. 김은선은 그때부터 자신의 인생이 꼬였다며 웃었다.
"시골에서 자라서 학습지가 뭔지 몰랐어요.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데 학습지 교사는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할 수 있다고 해서 들어갔어요. 알고 보니 속은 거예요. 일찍 끝나지도 않았고, 일이 많았어요. 99년에 학습지 노조가 생겼어요. 처음엔 노조에 가입하기를 꺼렸어요. 노동조합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거든요.
노동조합가입 권유를 세 번째 받고서야 조합원이 됐어요. 그때 노조가 파업을 할 때였어요. 가입과 동시에 파업을 하고, 파업 마무리 후 노조 전임자가 됐어요. 2년 동안 전임자로 일하고 다시 현장으로 복귀했다가 2005년에 그만두었어요. 돌이켜보면 그때 가장 열심히 살았던 것 같아요."
"노조도 지역과 함께 통 큰 부문 운동 조직해야"
▲ 2019년 서울시의회 앞에서 청소년에게 월경용품 보편지급을 촉구하는 김은선(왼쪽)
대학원 학비를 벌기 위해 취업한 곳에서 얼떨결에 노동조합 활동을 시작한 김은선은 그곳에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같은 일을 하면서도 정규직, 비정규직으로 나뉜다는 것도 알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28살에 노조 부위원장이라는 중책을 맡았다. 첫 번째 임금단체협상을 잘 치렀지만 다음 해 투쟁에서 미흡함이 나타났다. 그때 마무리를 제대로 짓지 못해서 엄청난 액수의 가압류를 받았다. 그리고 조직력이 많이 약해진 지역으로 가서 다시 학습지 교사로 일했다.
"지금 남편하고 학교 다닐 때부터 연애를 했어요. 노조 활동 할 때, 남자친구(현 남편)가 휴가를 나오면 제가 삭발을 하고 있거나, 노숙 농성을 하고 있었어요. 제대로 연애를 못 했죠(웃음). 그래도 제 인생에서 가장 역동기였고, 배운 게 많은 시기였어요."
김은선은 학습지 회사 노동조합 활동을 정리한 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서울본부로 옮겨 조직국장으로 일했다. 노조 활동을 하느라 사회복지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게 한으로 남자, 사이버 대학에 입학해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딴 뒤, 민주노총 서울본부 활동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지역아동센터 서울시 지원단 지역사회복지사로 1년 동안 일했다.
"민주노총 서울본부에 있으면서 다양한 투쟁을 해보니 노동조합이 너무 자기 안에만 갇혀 있는 것 같았어요. 노동조합은 기본적으로 자기 조합원들의 경제 투쟁을 할 수밖에 없지만 거기서 멈추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역사회복지사로 일하면서 본 사회복지 현장은 너무 헌신적이고 시혜적인 모습이었어요. 노동하고 동떨어져 있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노동과 사회복지가 만나야 된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사회복지 현장에 있는 사람들도 노동자라는 걸 인식하고 노동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마인드가 필요하고, 노동조합도 자신의 이익을 넘어서서 지역과 함께 통 큰 부문 운동을 조직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래서 2013년에 민주노총 산하 희망연대노조의 조합원들과 지역주민이 함께 '사단법인 희망씨'라는 단체를 만들었어요."
"노동조합과 사회를 연결하는 활동가 되고 싶어"
▲ 2019년 11월 희망씨에서 급식비지원과 자매결연을 하고 있는 뻘벗학교 방문했을때 아이들과 함 께 이야기 나누는 김은선.
김은선은 희망씨의 초기멤버다. 현재는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희망씨는 노동과 지역사회가 함께 만들어 가는 아동청소년지원 나눔연대 법인이다. 노동자가 주체가 되어 나눔연대·생활문화연대를 위한 지속가능한 활동을 하며 지역사회와 함께 일터와 삶터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코로나19 발생 전에는 가족캠프, 아버지 학교, 네팔 아동 자매결연 사업을 위해 네팔 여행 프로그램이 있었다. 작년과 올해는 코로나19 때문에 이러한 프로그램을 진행하지 못하고 위기가정 지원사업을 주로 하고 있다. 코로나19로 공공기관, 복지관이 다 문을 닫자 갑자기 형편이 안 좋아진 사람들이 어디에 가서 상담하고 지원을 받아야 하는지 모를 때 희망씨의 문을 두드린다고 한다.
"미등록자녀를 둔 한국인 아버지가 지역의 주거복지센터를 통해 희망씨에 오셨어요. 상황이 너무 안 좋았어요. 그분의 건강 상태와 수입만 봐도 기초생활수급을 받을 수 있는 처지인데 자녀들이 미등록자이다 보니 지자체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 안 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거예요.
국적을 취득하는 게 가장 시급한 문제인데 그게 안 되어 있어서 난감한 처지였죠. 그때 저희 희망씨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초스피드로 국적을 취득해 줬어요. 국적을 취득하고 나니 그다음 문제는 일사천리로…(웃음) 코로나19 때문에 상반기에 쓸 가정지원 사업비가 다 소진될 정도로 이와 같은 사례가 많았어요.
다음으로는 산재 가정 지원사업을 하고 있어요. 산재를 당하면 산재 당사자에게만 집중하잖아요. 그 가운데서 가족이 소외되고 있어요. 가족이 겪는 엄청난 상실감과 경제적 어려움을 도와야 하는데 이게 빠져있어요. 올해는 산재 가정을 돕는 지원 시스템을 연구하는 사업도 하고 있어요."
코로나19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취약계층을 돕는 일, 이 일은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해야 할 일 아닌가. 정부 기관은 문을 닫고, 대면 접촉을 꺼리니 민간 기관에서 나설 수밖에 없다고 해도 정부의 안이한 태도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K방역 운운하며 세계적으로 인정받으면 뭐하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은 차고 넘치는데.
'매월 시민들의 쌈짓돈에서 나오는 후원금으로 운영하는 민간단체가 정부보다 더 적극적으로 일하는 게 맞나?'하는 의구심과 불만의 눈빛으로 김은선을 쳐다보자, 그는 단호한 표정으로 "정부나 지자체에 바라는 게 없어요"라고 말했다.
코로나19 발생 전에 진행했던 '아버지학교'라는 프로그램에서 받은 감동적인 일화를 이야기했다.
"B지역에 계신 어느 남성분이 아버지학교 프로그램을 신청하셨는데 그분의 자녀가 시각장애인이었어요. 장애인이 참여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해보지 않아서 고민이 되었어요. 장애인 활동을 하는 분과 의논을 하고 비장애인 아이들도 다 같이 눈을 가리고 아빠 손을 찾은 프로그램을 했어요. 열 가족이 참여했는데 아이들이 모두 자신의 아빠 손을 찾았어요. 아빠들은 너무 놀라셨고, 감동 받았다고 했어요.
저녁에 캠프파이어 할 때는 아빠와 이런 시간을 보낸 적이 없었는데 아빠와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해요. 나중에 아빠들만 따로 모아 이야기를 했어요. 아빠들은 그동안 남편, 아빠, 아들로만 살았지 나를 돌아본 경험이 없었는데 이 기회에 자신을 열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돼서 정말 좋았다고 하셨어요.
이처럼 희망씨가 노동조합과 지역, 노동조합과 청소년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했으면 좋겠어요. 사회에서 기득권을 차지하는 남성, 정규직, 임금 인상을 중요시하는 현재의 노동조합 말고, 지역의 청소년과 여성, 장애인, 성 소수자를 만났으면 좋겠어요. 희망씨가 그 가교 역할을 하고 싶어요. 그러려면 희망씨가 더 많이 고민해야 하고 우리(희망씨)를 강조해서는 안 될 것 같아요. 우리가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다른 지역과 다른 단체와 연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는 일, 그런 일을 하고 싶어요.
지역사회에서 안타까운 일은 자신의 단체도 어려우니까 자기 단체만 생각하고 밖으로 못 나오는 일이에요. 그래서 이 단체들이 가지고 있는 어려움을 엮어서 노동조합과 만날 수 있는 일을 우리가 하려고 해요. 저는 노동조합하고 이 사회를 연결하는 활동가가 되고 싶어요. 그러려면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불어 사는 사회로 가는 모습으로 변해야 하잖아요. 이 상태로는 안 되잖아요. 의식을 바꿔야 하고, 제도를 바꿔야 하고. 그래서 요즘에는 어떻게 하면 운동의 방향성과 지향을 좀 더 분명히 하고 목적의식을 갖는 활동가가 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고 있어요."
"한 명 한 명이 이 조직에서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 받았으면"
▲ 2019년 5월 1일 노동절 집회 당시 희망씨 홍보부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나와 내 가족이라는 '우리'에 갇혀 주변을 살피지 못하고 살 때가 많다. 개개인이 잘 먹고 잘살아야 사회도 건강하고 국가도 발전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장벽을 부수고 나오지 않으면 '개인주의'라는 무서운 복병을 만날 수 있다. 김은선은 자신의 단체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면서, '선견지명'이라 할 만한 야심 찬 일을 저지르고 있었다.
"노동자와 지역의 청소년들이 좀 더 긴밀하게 만나는 공간을 만들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공간 마련을 하면 동시에 사업을 확장해야 되잖아요. 조직에서 중심을 잡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방향이 흐트러지지 않기도 하지만 그 사람에게만 집중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주변에서 겉돌 수 있어요. '희망씨', 하면 김은선이 떠오르는 게 아니라, 한 명 한 명이 이 조직에서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실제로 그런 말(활동가들로부터 성장한다는)을 듣기도 해요(웃음). '사람보다 일이 앞서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는데 맞아떨어졌어요.
그런데 지금 공간 마련 때문에 홍보를 해야 해서 희망씨를 드러내고 싶어요. '희망씨가 뭐 하는 곳이지?'라는 질문을 자주 받아요. 희망씨는 '노동조합이 아동·청소년을 지원하는 기관'이라고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 시키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요. 그래서 노동자들이 후원금을 내든, 자원봉사를 하든, 연대 사업을 하든 지역과 나눔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기관이라는 걸 확실하게 알리고 싶어서 공간 마련 사업을 하고 있어요. 지금까지는 딜라이브노동조합이 사무실 한 켠을 무상으로 임대해 주어서 거기서 활동했어요.
공간을 마련하면 저희가 지원하고 있는 청소년들이 미술 전시회도 하고, 청소년 작업장도 만들고, 작업장에서 기술을 배우면서 진로를 꿈꾸기도 하고요. 그러면서 노동에 대한 인식도 넓히고. 심리상담사를 초빙해서 상담할 수 있는 공간도 만들 거고요.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많은 것을 희망씨라는 공간에서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웃음)."
김은선은 희망씨의 독립공간 탄생을 꿈꾸며 세상 행복한 얼굴로 말했다. 그동안 말로 다 하지 못할 고생을 한방에 털어 버린 듯한 표정이다. 그리고 최근에 발견한 스트레스 해소법을 이야기했다.
"요즘 사람들이 저를 보고 '편안해 보인다'고 해요. 요새 타로를 하거든요. 저는 40대가 정서적으로 가장 많이 성장한 시기예요. 희망씨 프로그램 중에 노동자 심리 상담, 명상, 타로가 있거든요.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저도 참여하니까 배운 거죠. 특히, 타로를 배우면서 일과 나를 동일시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고, 욕심을 버리게 됐어요. 그러다 보니까 심호흡을 하게 되고, 객관적으로 생각하는 습관을 들이게 됐고요. 어느 순간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사라지고 있어요.
저희가 하는 타로 강좌는 점을 치는 법을 가르치지 않아요. 타로 카드를 통해서 이 사람과 어떻게 소통해야 할지 어떤 질문을 해야 할지를 알고 이야기를 시작해요. 어떤 이야기가 이 사람에게 힘을 줄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거죠. 그러면서 관계도 안정되고, 오늘 나에게 필요한 힘은 이런거구나를 알고 하루를 시작하니까 마음이 가볍고 편안해요. 희망씨에서 하는 타로 강좌는 인기가 많아서 금방 마감된답니다(웃음)."
유쾌하게 인터뷰를 마무리하는 김은선을 보며 오늘 나의 타로카드는 무엇이었을지 궁금해졌다. 보나마나 명랑하고 행복한 김은선을 만날 점괘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