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시대에 청각장애인이 살아 가는 법
‘아 참, 마스크!’
오늘도 마스크를 깜빡 잊고 현관문을 열고 100미터쯤 가다가 생각이 났다. 언덕길을 올라 집으로 가서 마스크를 챙겼다.
‘코로나19’라는 역병 속에서 산지 3년째다. 현관문을 나설 때 가장 먼저 챙기는 것이 핸드폰과 지갑에서 마스크가 추가 되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마스크를 쓰고 살아야 할지 아무도 모른다. ‘방역의 최전선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 비하면 마스크 하나 쓰고 다니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 라거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마스크 잘 쓰는 것 말고 뭐가 있나’라는 말도 맞는 말이다.
바이러스는 좀체 수그러들지 않고 새로운 변이바이러스까지 생성했다. 정부는 자영업자의 시름이 늘고 국민의 피로감이 높자, 위드코로나를 시행했다. 꼼꼼한 정책이 뒷받침 되지 않아 감염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다시 방역을 강화했다.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이제는 방역패스를 도입해 백신을 맞지 않으면 다중시설은 이용할 수 없다고 한다. 새해가 밝았으나 우리의 삶은 여전히 암흑 속이다.
‘지구를 아끼지 않은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며 살고 있다’며 상황을 인정하고, 불편함을 감수하겠다는 것과는 별개로 내게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고통이 하나 더 있다. 나는 경증의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다.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상대방의 입모양을 봐야만 소통이 가능하다. 하지만 지금은 감염 예방을 위해 모든 사람이 마스크를 쓰고 있다. 따라서 사람들의 입모양은 마스크에 가려져 볼 수 없다.
청각장애가 있는 나는 마스크로 가려진 입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상대방과 순조롭게 대화를 하기 어렵다. 호기심이 많아 질문이 많은 나는 궁금한 것이 있어도 예전처럼 묻지 못한다. 상대방의 입모양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대답을 들을 수 없어서다.
며칠 전에는 복지카드의 유효기간이 만료되어 주민센터를 찾았다. 직원에게 복지카드가 만료되어 새 카드를 발급 받으러 왔다고 하니 이것저것 설명을 해준다. 마스크로 가려진 입 속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나는 들을 수 없었다. 청각장애가 있다는 것을 안다면(유효기간이 만료된 카드에도 청각장애라고 명시되어 있음), 마스크를 잠깐 내리고 말하는 센스를 보일법도 한데 직원은 그러지 않았다.
“잠시만 마스크를 내리고 말했으면 좋겠어요.”
내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직원은 마스크를 내리지 않았다. 마스크를 내리고 말 하라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혹시나 마스크를 내리고 말했다가 전염병에 걸리면 내가 책임져야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이 있을까. 바로 ‘필담’이다.
“선생님의 말씀을 잘 못 알아 듣겠어요. 마스크를 내리기 어려우면 메모지에 써 주시면 좋겠어요.”
이번에도 직원은 메모지에 적을 생각이 없는지 마스크 속에서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었다.
주민센터에서 사소한 민원을 하나 처리하려고 갔는데, 마치 서로의 언어가 달라서 소통할 때 쓰는 ‘바디랭귀지’를 하고 있었다.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는 해프닝이 벌어진 것이다.
2020년 1월 코로나19가 발생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미안하지만 마스크를 잠시만 내리고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라는 말을 무한반복 하면서 살고 있다. 내 말을 이해하고 마스크를 살짝 내리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그렇지 않고 꿋꿋이 마스크를 쓴 채로 말하는 사람도 많다. 마스크를 내리고 말하지 않는 사람에게 청각장애인을 배려하지 않는다고 비난할 여지가 없어졌다. 마스크를 내리고 말했다가 바이러스의 공격을 받을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평소 같으면 ‘당신의 장애인식수준은 너무 낮아요’라면서 그냥 지나치지 않았을 텐데 이제는 그러지 못한다.
나는 마스크가 무섭다. 마스크 속에서 저 사람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놓치면 안 되는 말이라도 하고 있으면 어떻게 하지?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니 ‘왕따'가 되는 것은 아닐까? ‘남들이 뭐라 하든 내 갈 길을 간다’는 모토로 살았던 내가 노파심 가득한 ‘완결주의’자로 변하고 있었다. 걱정과 두려움은 사람을 움츠려 들게 한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고 수시로 사람을 만나 수다 떠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이와 같은 시련 앞에 놓이니, 지금의 나는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마스크 공포감이 덜 들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얼마 전에 입모양을 볼 수 있게 하는 투명마스크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을 만든 그 사람은 천재가 아닐까. 나는 왜 이토록 간단한 방법을 떠 올리지 못했을까. 뒤통수를 쳤다. 이제는 ‘마스크를 벗고 말해주세요’라고 하지 않아도 된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싶으면 (내가)투명마스크를 건네면 된다. 그런데 왜 내가 투명마스크를 건네야 하지? 언제 어디서 청각장애인을 만날지도 모르니 투명마스크 한 두 개 쯤 가지고 다니면 안 될까? 세상에는 귀가 잘 들리는 사람들만 살고 있지는 않을텐데 말이다. 그렇다면 투명마스트를 쉽게 구입할 수 있도록 약국이나 슈퍼마켓에서 팔아야 하는데 파는 것을 보지 못했다.
내 친구 중에는 휠체어를 타는 친구들이 있다. 엘리베이터 없는 건물은 왜 이렇게 많지? 인도에는 턱이 있어서 휠체어가 지나가기 힘든 곳도 많다. 시각장애를 가지고 있는 친구가 안내견을 데리고 식당에 들어갔더니 식당주인이 개를 밖에 놔두고 들어오라고 한다. 그럼 밥은 어떻게 먹어? 굶어 죽으라는 소리네. 오늘도 ‘정상’ 기준을 들이대며 나를 움츠리게 하는 이 사회를 어떻게 바꿀까 고민하며 오지 않는 잠을 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