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 감각이 떨어지는 편이라 머릿 속에 기억하고 있는 날짜들도 몇 개 안 되지만, 12월 28일만큼은 잊지 못하고 있다. 주말에, 집안에만 있기 답답해 바람이나 쐴까 하고 아이들을 차에 태워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우연히 '그곳'을 지나쳤다.
딱 10년 전, 12월 28일.
회사 선배들과 술 약속이 있다던 남편은 밤 늦도록 집에 오지 않았다. 때마침 하루종일 폭설이 내려 정말 말 그대로 온 세상이 하얗게 뒤덮인 날이었다. 그리고 나는 6개월 차에 접어든 임신부이기도 했다. 술과 술자리를 좋아해 술만 먹으면 12시를 넘겨 오기 일쑤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어느덧 시간은 12시를 넘어 1시를 지나고 있었고, 혹시나 싶어 아무리 전화를 해도 신호만 갈 뿐 받지를 않았다. 갑자기 마음이 쿵쾅거리며 오만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아닐 거야. 싶으면서도, 술 취해서 길거리 어딘가에서 쓰러져 있는 거 아닐까, 눈길에 교통 사고라도 난 건 아닐까, 한창 '퍽치기'라는 말이 뉴스에 자주 나오던 때였는데 그런 못된 사람들에게 당한 것은 아닐까.
몇 십 번 전화를 걸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옷을 대충 입고 집을 나섰다. 사람들의 자취가 뜸해진 시간에도 눈은 하염없이 내려 어디가 인도이고 차도인지도 구분도 안되었다. 눈길에 어떤 안전도 담보하기 힘든 소형차였는데 기어이 차를 몰고 남편 회사 근처까지 천천히 갔다. 길거리는 쥐죽은 듯 조용했고 행여 어딘가에 남편이 쓰러져 있는 건 아닌가 싶어 회사가 있는 동네를 모래알에서 바늘을 찾겠단 심정으로 샅샅이 헤매고 돌아다녔다. 허탕을 치고 집에 돌아오면서도 혹시나 들어와서 자고 있지 않을까 했지만 집에 들어와도 남편의 흔적은 없다. 그때부턴 갑자기 현실의 공포가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아, 이제 뱃속의 아이는 아빠 없는 아이가 되는 건가. 교사 월급으로 서울 땅에서 아이를 잘 키워낼 수 있을까.
주무실 부모님을 깨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무에게도 말도 못한 채 1분 1초를 두려움으로 보내다 새벽 4시,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남편이었다.
"아, 추워, 여기 00상가야."
뭐라 횡설수설 하는 와중에 00상가라는 말을 또렷이 내뱉기에, 다시 차를 몰고, 눈이 더 쌓인 길을 되짚어 회사 근처에 있던 상가 건물에 갔다. 목불인견(目不忍見)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인가. 그 춥고 눈이 내리는 겨울 날, 몇 주 전에 산 코트와 신발은 다 어디로 가고 맨발에 셔츠 차림으로 상가 한 귀퉁이에서 벌벌 떨고 있는 남편을 발견했다. 휴대전화도 잃어버려 상가 건물의 관리실에 있던 전화기로 나에게 연락을 했던 거였다. 남편을 차에 태우고 돌아와 침대에 눕히고 그제서야 나도 마음 편히 잠이 들었다.
그 상가 앞을 지나치며 남편은, 그때 싸움에 휘말렸던 것 같기도 하고, 누군가 시비를 걸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다 어디서 잠이 든 것 같기도 하고, 꿈과 현실이 뒤얽힌 장면 장면이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고 한다. 남편과 달리 나는 아직도 그때의 시간들이 생생히 떠오른다.
한동안은 이야기만 꺼내면 화가 나서 화제에도 올리지 않았지만, 10년쯤 흐르니 둘 다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에피소드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도 정말 아찔했던 상황이었다. 만약 폭설로 길거리에 사람이 하나도 없던 그곳에서 남편이 계속 잠을 청했다면, 나에게 연락할 전화기를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남편에게 웃으며 나를 생명의 은인으로 생각해야 된다고 이야기하는 걸 듣고 차 안에 있던 둘째가 물었다.
"왜, 아빠 무슨 일 있었어?"
"응, 무슨 일이 있었는데, 그때 엄마 아니었음, 네가 아예 태어나질 못했을 거야."
남편은 그후로도 술자리 이후 행방이 묘연해져 나를 공포와 분노 사이에서 오락가락 하게 만들곤 했다. 남의 집 집들이에 가서 그 집에서 잠이 들었다가 당당하게 나한테 집에서 잤는데 왜 전화를 했냐며 술기운 가득한 목소리로 나에게 도리어 화를 낸 적도 있고, 집에서 걸으면 5분 거리인 회사 숙직실에서 자다가 아침 일찍 출근한 선배에게 집에 가야 한다며 택시비 만 원을 빌려서 주머니에 넣고 온 적도 있다. 언젠가는 경찰에 실종 신고도 해 본 적이 있으니, 그야말로 애간장들이 녹아댔던 기억들이다. 시간이 꽤 흐르고 나니, 그래도 남편의 '무사 귀환'으로 마무리 지어진 게 얼마나 다행인가 싶기도 하다.
그러고보니 우리 가족이 오늘 하루를 별 일 없이 보냈다는 것은, 이런 여러겹의 행운들이 켜켜이 쌓인 결과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오늘 내가 보낸 하루는 우연한 시간도, 당연한 것도 결코 아닐 것이다. 그저 매일 매일 비슷하게 살아간다는 것이야말로 삶에서 맞이할 수 있는 최고의 기적이 아닐런지.
모두가 어느 때보다 무탈하기만을 바란 2020년을 지내다 문득 내 삶에 깃든 행운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매일을 나의 일상을 살게 해 주는 하루치의 '운'에 감사하며 마무리할 수 있기를. 내년의 가장 큰 소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