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교무실을 쓰는 선생님이 잠깐 밖에 나갔다 붕어빵 한 봉지를 사들고 돌아오셨다.
"붕세권이란 말 알아요?"
붕어빵을 베어물며 한 선생님이 이야기를 써내신다. 요즘 길거리에서 파는 붕어빵 찾기가 귀해서 붕어빵을 살 수 있는 동네를 일컫는 말로 쓰인단다. 그러고 보니 그 많던 붕어빵들이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붕어빵을 먹을 때마다 나는 '만철이 엄마'를 떠올린다.
어려서부터 직장 나가시는 부모님을 대신해 나를 돌봐주셨던 분들이 계셨다. 화자 이모, 양림동 할머니, 두암동 할머니. 만철이 엄마는 양림동 할머니와 두암동 할머니 사이에 잠깐 우리집에 계셨던 분이다.
화자 이모는 우리집에서 살며 주말이면 방통고에 다녔다. 워낙 어렸던 시절이라, 일상적인 일들은 잘 떠오르지 않지만 화면 조정 시간에 나오는 음악을 틀어놓고 혼자 춤을 추다 이불 더미에 얼굴을 파묻고 엉엉 울던 장면, 옆방에 세들어 살던 '새댁'이랑 우리 엄마의 흉을 보던 모습이 기억에 남아 있다. 내가 기억하는 화자 이모의 마지막은 무릎을 꿇은 채 엄마에게 혼이 나던 모습이다. 우리 가족이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게 되면서 자연스레 헤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은 화자 이모는 사귀던 남자 친구와 야반 도주를 했던 것이고, 엄마에게 혼나던 장면도 그 남자 친구와 놀다 말도 없이 외박을 하고 난 다음날의 이이란 것을 다 커서 알게 되었다.
이사를 가고 나서는 양림동 할머니가 나를 돌봐 주셨다. 양림 교회에 다니셨는데, 틈만 나면 성경책을 읽으시거나 찬송가 책을 펴고 노래를 부르셨다. 막 악보를 보기 시작했던 내가 옆에서 따라 부르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가사가 지겨워져 그만 부르려고 하면, 찬송가를 중간에 멈추면 죄를 받는다며 끝까지 부르자고 권하곤 하셨다. 집에 놀러 오시는 친할머니와 가끔 화투도 치셨는데, 옆에서 얼쩡대고 있으니 화투 짝들이 어떻게 맞는지 알려주셨다.
양림동 할머니가 왜 갑자기 우리집에 오시지 않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다. 내 입장에선, 양림동 할머니가 하루 아침에 사라지고 오전에 잠깐 혼자 있는데 초인종이 울려 문을 열어 보니 '만철이 엄마'가 우리집에 들어오셨다. 빼빼 마른 몸에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 '만철이 엄마'에 대한 나의 첫 느낌은 '마귀할멈'이었다. 만철이 엄마는 내게 잘 해주시려 부던히 애를 썼다. 매일 우리집에 오시면 다정스레 인사를 건네셨고, 냉장고에서 수시로 간식을 꺼내 손에 쥐어주셨다. 그런데 한번 '마귀할멈'으로 각인된 다음엔 도통 인상이 바뀌질 않았다. 친절한 모습들이 내겐, 마귀할멈의 계략처럼 느껴져 내가 생각하기에도 만철이 엄마에게 퉁명스럽게 대하거나 밑도 끝도 없이 화를 내거나, 울어버렸다. 엄마는 나를 이런 저런 말들로 설득하시려다 포기하시고 만철이 엄마는 우리집에 더 이상 오지 않으셨다.
그 다음에 오신 두암동 할머니는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무렵까지 쭉 우리집에 계셨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처음 오신 순간부터 내가 잘 따랐다. 어디선가 주워 듣고 와서 엄마한테 '두암동 할머니와 나는 궁합이 잘 맞는 것 같아.'라는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니까 만철이 엄마는, 나를 돌봐주러 우리집에 오신 분들 중 내가 유일하게 싫어했던 분이다.
한동안 기억에도 없던 만철이 엄마의 소식을 다시 듣게 된 것은, 내가 고등학생 때였다. 오빠의 담임 선생님과 면담을 하고 오셨던 엄마가 다 식어빠진 붕어빵을 몇 십 개 들고 집에 오셨다.
"만철이 엄마 기억하니? 너 어릴 때 우리집에 잠깐 있다 나가셨던. 오빠 학교에 갔다 오는데, 학교 앞에서 만철이 엄마가 붕어빵을 팔고 있더라고. 반가운 마음에 좀 팔아주려고 했는데 사려던 것보다 훨씬 많이 넣어주더라. 에휴, 장사를 하려면 사람이 이런 걸 좀 확실히 해야 하는데, 이렇게 정만 많아가지고 돈은 어떻게 벌겠다고. 근데 이렇게 좋은 사람을, 넌 어릴 때 왜 그렇게 마다했니?"
이미 눅눅해져 축 늘어진 붕어빵을 씹으며, 드라마 속에서 부잣집에서 자란 재수없는 막냇딸이 다른 이들을 하대하는 장면을 떠올렸다. 나도 어렸을 때 만철이 엄마에겐, 그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우리집은 부자도 아닌데.
다시 만철이 엄마의 이야기를 듣게 된 건 몇 년 후였다. 내가 큰 이후에도 우리집에 종종 놀러오시던 두암동 할머니가 엄마한테 하는 말을 우연히 엿들었다.
"만철이 엄마, 세상에 그 고생고생 하면서 아들 키우고, 이제 애들이 대학도 가고 취직도 하길래 신세 좀 피려나 생각했더니 글쎄 교통사고로 죽어번졌대. 그 자리에서 바로 가버렸나봐."
두암동 할머니를 자기 대신 우리집에 소개해 준 게 만철이 엄마였단 사실도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그 이후로 나는 붕어빵을 먹을 때마다 '만철이 엄마'를 떠올린다. 아주머니의 이름도 얼굴도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지만, 어디선가 요구르트 하나를 가지고 오셔서 마시라고 주셨던 것, 내가 뾰루퉁해 그 손을 쳐내던 순간은 마음 한 켠에 여전히 미안함으로 자리잡고 있다. 아주머니가 살았던 모진 삶에 어린 나까지 돌팔매질을 거든 셈일텐데, 나는 단 한 번도 제대로 사과를 하지 못했다.
살아오며, 살아가며 타인들에게 나는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저질르려는지. 제대로 사과할 수 있는 시간이나 기회를 찾을 수나 있을지. 그들은 내 사과에 용서의 손길을 내밀어 줄지.를 생각하면 아직도 아득하기만 하다.
상처 받지 않는 삶을 살려고 하기 전,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는 삶을 살아야한다. 나의 말과 행동에, 아니 존재자체에도 책임을 져야 하는 나이이다. 다른 이들을 위해 공부하고 고민하며 살자.
식어가는 붕어빵을 집어들며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