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모를 만나는 것은 왜그리 꺼려질까? 그들과 나는 아무런 이해관계에 있지도 않은데. 나 또한 교사로서 다른 교사를 만나는 것은 거리낌이 없으나 학부모로서 내 아이들의 교사를 대하는 것은 늘 어렵기만 하다.
코로나의 영향으로 학교가 텅 비게 된 어느 날, 외부인 출입을 삼가야 하는 상황인데도, 학부모와 마주하는 것을 너무 불편해 하면서도 굳이 한 학부모를 학교에 오시게 했다. 그만큼 시급한 사안이었다.
조퇴를 고집하는 아이를 앉혀두고 한 시간동안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야기를 듣다 보니 아이에겐 엄청난 몸과 마음의 상처가 보였다. 그것이 상처인지도 모른 채 그냥 앉아 있으면 눈물이 왈칵 나서 힘들다고 했다. 아이의 상처를 치유해 나가기 위해서는 어머니가 꼭 필요했다.
다행히 그 아이의 가정을 잘 아는 분들이 학교에 계셨다. 아이의 어머니 또한 삶에 상처를 가득 받고 살아오신 분이라고 했다. 대부분 그렇다. 상처 받은 아이는, 상처 받은 가족에게서 생겨난다. 상처가 가득한 이들은 다가오는 손들에게 본능적으로 거리를 둔다. 힘든 아이들을 도우려고 할 때 제일 어려운 부분이다. 제발 전화를 받아주길 빌며 번호를 눌렀다. 동료 교사의 걱정과 달리 의외로 통화는 쉽게 연결되었다. 아이 엄마가 전화를 받자 마자 기다렸다는 듯 아이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아유, 선생님은 다른 선생님과 다르시네요. 네네. 감사합니다."
전화를 마무리지으며 나는 또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았다.
내가 아이의 칭찬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며 중간중간 약간의 염려를 곁들이다 다시 칭찬으로 마무리한 건 깊은 속내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학교에 무척 거부감을 느껴한다는 어머니를 어떻게든 학교에 오시게 하기 위한 유인책이었다. 아예 없는 사실을 거짓으로 꾸며 이야기한 건 아니었지만, 아이의 사소한 일을 과하게 칭찬을 하면서도 이런 유치한 방법이 과연 통할까 싶은 의구심도 들었다.
전화를 끝내고, 수많은 선생의 전화를 받으며 머리를 조아렸을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이를 아프게 내버려 둔 악인이 아니라, 그저 누군가의 칭찬이 고팠던 또다른 어린 아이를 만난 느낌이었다.
며칠 뒤, 어머니를 빈 교실에서 만났다. 전날 아이에게 어머니가 학교 오시는 것에 대해 스트레스 받아 하지 않으셨냐 슬쩍 물으니, 전날까지 네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담임이 날 부르냐며 자꾸 다그치더란 이야기를 했다. 아이의 이야기를 힌트로 삼고, 어머니가 교실에 나타나자마자 또 아이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았다. 단, 이번에는 좀 더 진심이 섞인 칭찬이었다. 어머니는 이야기를 듣다 곧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정말 모진 세상을 살아내셨구나, 거기서 버텨내셨구나. 맞장구를 치며 나도 모르게 이야기에 빠져 있었다.
기회를 엿보다 슬쩍, 아이의 상황을 이야기했다. 치료가 절실히 필요한 상태를 차분히 전달했다.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어머니가 입을 여셨다.
"당장, 병원에 데려갈게요."
여느 학부모와 달리, 목례가 아닌, 양손을 흥겹게 흔들며 우는듯 웃는듯 묘한 얼굴로 떠나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며, 아이의 상처를 어머니가 잘 다독여낼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아이에게 전화를 걸어 면담했던 내용들을 전하고,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어머니는 널 훨씬 더 많이 사랑하시는 걸 확인했다고 얘기하니 아이의 목소리도 조금은 밝아졌다.
그리고 며칠 후, 어머니는 나와 약속했던 일들을 하나씩 지켜가고 있는 중이다. 얼마나 지속이 될지, 이게 아이가 상처를 이겨내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될지 막연하지만, 그래도 한 걸음을 뗐다.
그래, 나도, 아이도, 어머니도. 인정 받고 사랑 받아야 힘이 나는, 그래서 서로를 비판하고 탓하기보다 함께 보듬고 나아가야 하는 나약한 존재들이었다. 이렇게 또 하나를 깨달으며 나는 성장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