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군의 죽음에 관련한 뉴스를 접했다. 여학생들을 가르치고, 딸 아이 둘을 키우는 입장에서 가슴이 답답해져 자세히 마주하기에 두려운 소식이다.
신혼의 달콤한 행복 앞에서 죽음의 흔적을 남기고 간 한 여성, 그리고 그녀를 그곳까지 몰아넣은 이들.
문득 '그 사람들'은 이 뉴스를 보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엄마를 따라 친척집에 갔었다. 처음 가 본 곳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남아 있는 걸 보면 그리 가깝게 지내는 친척은 아니었던 것 같다. 가뜩이나 낯을 많이 가리던 성격에 잔뜩 움츠려 들었던 날 누군가가 작은 방으로 불러들였다. 꽤 커 보이는 오빠가 둘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중 한 명이 쭈뼛쭈뼛거리는 내 손을 잡아 자신의 바지 속에 집어 넣었다.
"이게 뭔지 맞혀봐."
유치원에서 종종 하던, 눈을 가리고 주머니에서 물체를 만져 무엇인지 이야기하고 그것을 꺼내 맞는지 확인하던 게임인 줄만 알았다. 손끝의 감촉만으로 난 어떤 물체의 이름을 댔고, 그 두 오빠들은 한참을 깔깔대더니, 그 '물건'의 정체를 내 눈앞에서 확인시켜 주었다.
웃어야 하는 건지, 울어야 하는 건지도 모르는 채 방에서 나와 그 집에 같이 갔던 친척 언니에게 이 이야기를 꺼냈다. 언니는 화들짝 놀라더니 나를 수돗가로 데려가 손을 깨끗하게 씻겨 주었다.
"엄마에겐 이야기 하지 마." 내가 그 시절의 엄마 나이가 될 때까지 엄마는 아직도 이 사실을 모르고 계신다.
가끔 역겨움이 치밀어 오르는 건, 그동안 할아버지, 할머니 팔순, 구순, 장례까지 치르며, 그들은 분명 그 어딘가에서 내가 있던 자리에 함께 했을 거란 사실이다. 나와 무슨 관계였는지, 어떻게 생겼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바지 속 손끝에 느껴지던 '물건'의 감촉, 방안에서 어떤 표정을 지을지 몰라 멍하게 앉아 있던 느낌은 시간을 건너뛰어 고스란히 내 몸 속에 남아 있다. 그들은 내가 '오빠'라고 불러 온 이들 중 누군가이다. 그날 이후 나는 나도 모르게 그들을 보며 웃었을 테고, 그들은 내가 그 아이인 줄 모르거나, 아예 그 일 자체를 지워버린 채 웃음으로 답했을 터이다.
중학교 시절, 친구 생일 선물을 사려고 학교 앞 문구점에 들렀다. 물건을 이것저것 둘러보고 있으니 콧수염을 기묘하게 기른 아저씨가 다가와 무엇을 찾느냐고 물었고, 생일 선물을 고르고 있다는 말에 자신이 도와주겠다며 바짝 몸을 붙였다. 콧수염보다 더 이상한 손길이 내 어깨와 엉덩이에서 느껴졌다. 아무거나 후다닥 사들고 얼굴이 시뻘게져 뛰쳐나왔던 그날 입었던 갈색 티셔츠, 그날따라 후끈하게 느껴졌던 골목길의 열기가 기억에서 되살아 난다. 학교에서 친한 친구에게 이야기를 하니 "너도 그랬니?"로 시작해 콧수염을 성토하는 말들이 꼬리를 물었고, 몇달 뒤 학교에서 그 콧수염 남자에게 항의하여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콧수염 남자의 입에서도,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게 아니라, 그냥 그렇다더라. 하는 이야기여서 정말인지 아닌지는 그때도 못 미더웠다. 그 콧수염 남자는, 이제 할아버지가 되었을 터이다. 혹시나 딸을, 손녀를 두고 살지는 않을까. 그는 그 시절을 어떻게 추억할까.
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과 우리는 참 애틋했다. 1년내내 말썽이란 말썽은 다 부리고 다니다 미운정 고운정이 들었는지, 반편성을 하며 선생님이 눈물을 보이셨고, 60명 가까운 우리반 아이들 모두 선생님의 눈물을 보며, 미운 마음을 싹 잊어버리고 3학년이 되어서도 친구들끼리 짝지어 선생님께 찾아가곤 했더랬다. 대학교에 간 후, 연락이 되는 아이들 몇과 반창회를 했다. 선생님과 저녁을 먹으며 가볍게 술을 마시고, 노래방에 들렀다. 내 옆에 앉으셨던 선생님은 그때부터 쉴새없이 내 한쪽손을 잡고 끊임없이 주무르셨다. 그 자리를 파할 때까지 나는 언제쯤 손을 자연스럽게 뺄까만을 고민했던 것 같다. 함께 했던 친구들은 그날을 아직까지 아련한 기억으로 이야기하지만, 내 기억 속 그 날은 축축했던 오른 손으로 남아 있다. 얼마 전, 선생님이 퇴직을 앞두시고 옛 제자들을 찾으신다며 다른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시간이 꽤 지났으니 괜찮겠지, 별 일 아니었으니 괜찮겠지 싶어 선생님의 연락처를 선뜻 받았는데, 차마 전화할 마음은 생겨나지 않는다. 내가 전화를 해서 그날의 이야기를 한다면, 선생님은 그일을 기억이나 하실까.
대학교 4학년 때, 막연히 광고 회사에 입사해야겠단 꿈을 꾸었더랬다. 작은 광고 회사에서 인턴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었다. 성이 참 독특했던 38세, 아들이 둘이었던 국장은 나를 참 잘 챙겨주었다. 그와 오랜 기간 같은 팀이었던 과장이 대놓고 질투를 할 정도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에게 이것저것 알려주는 그가 참 고마웠다. 어느 날 밤 11시까지 야근을 하고 집에 가려는데, 그가 날 불렀다. 시간이 늦었으니 내가 살던 집까지 태워다주겠다고 했다. 길치에다 지하철만 타고 다니던 탓에 서울 지리도 잘 몰랐지만, 적어도 내가 살던 곳과 그의 집은 지하철 역으로도 정 반대방향이라는 감은 있었기에 거절했다. 그런데 밤이라 얼마 안 걸린다며 고집을 부리더니 나를 자신의 차에 태웠다. 내가 초저녁 잠이 많은 게 화근이었나보다. 깜빡 잠이 들었다 깨보니, 우리집이 있던 동네가 아닌, 경기도 외곽에 차가 서 있었다. 그의 손이 내 옷속을 파고 들고 있었다. 깜짝 놀라 당장 차에서 내리겠다고 소리를 질렀더니, 그는 손을 비비며 한번만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38세 성이 특이했던, 두 아들의 아빠는 그 순간 한 마리의 똥파리보다도 더 못나보였다. 회사에서 친하게 지내던 언니는 내 이야기를 듣더니, 곧바로 날 타박했다. 그 차에 왜 탔냐, 그런 사람인 줄 몰랐냐. 그리고 조언도 해줬다. 괜히 이야기해봐야 너만 이상한 년 된다. 그냥 그 사람 피하면서 조용히 지내라.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즐겨입던 베이지색 카디건이 사무실 의자에 그대로 걸쳐져 있었는데, 다시는 회사로 돌아가지 않았다. 나는 그곳에서 하루아침에 토낀 이상한 년이 되어 있다는 소식을 나중에 듣게 되었다. 성이 독특해 아직도 이름이 잊히지 않는 그는, 어느 대학에서 대학생들을 가르치고, 삶의 낭만을 잔뜩 머금은 듯한 책도 냈었나보다. 똥파리는 그렇게 잘 포장이 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그 사무실에서 그래도 날 안타깝게 여겼던 선배 직원이 있었다. 이런 일로 꿈을 버리지 말라며, 다른 광고 일을 하는 친구인지 선배인지를 만나는 자리에 날 불러주었다. 집에서 옷장을 뒤집어 엎고 옷정리를 하다 선배의 전화를 받고 쪼르르 술자리로 갔다. 그날, 그간 쌓였던 것들을 그렇게 술로 푼 내 잘못이었었나보다.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술에 취했고, 그 선배의 친구인지 선배인지 하는 사람이 날 데려다 준다며 택시에 같이 탔는데, 집에 도착하는 순간 집으로 같이 들어가자고 했다. 술이 번쩍 깼다. 덩치도 꽤 큰 놈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를 현관 한쪽으로 밀어붙여 집안으로 들어왔는데, 내가 필사적으로 저항하니, 그도 똥파리 국장처럼 줄행랑을 쳤다. 내가 살던 오피스텔 1층 문이 버튼을 눌러야 열린다는 것도 모르고 1층에서 혼자 고뇌에 빠졌었나보다. 한참 뒤 문을 똑똑 두드리더니 머쓱한 목소리로 나가려고 하니 문 좀 열어달라고 했다. 그놈 명함도 받았었는데, 다음날 갈갈이 찢어버렸다. 지금은 그게 후회가 된다. 그 이름 석자를 오래오래 기억해 줄걸. 그 멍청한 모습을 여기저기 좀 널리 알려볼걸.
그 후로 사회 생활을 하면서 나는 종종 술자리의 안주가 되곤 했다. 얼굴에 여드름이 많이 났던 언젠가 내 주변에서 술을 먹던 이들은 내가 '남자 맛'을 못 봐서 저런 거라며 '남자 맛'을 특효 약으로 제시했고, 술을 마시고 나오다 비가 내리자 또 어떤 이는 내 우산 속으로 들어와 내 팔뚝 살은 만지기도 했다. 그 자리에서 화를 버럭 내고 밀어버리고 싶었지만, 그를 밀어내면 그와 내가 동시에 알고 있는 모든 이들이 내 세계에서 밀려나가 버릴 것 같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그는 내가 집으로 갈 때까지 한참을 내 우산 밑에서 내 팔뚝에 손을 대고 있었다. 그를 아는 이들은 그의 인품에 대해 종종 칭찬을 하지만, 난 그때마다 입을 다문다. 그리고 그날 입었던, 팔뚝 밑이 패여있던 초록색 원피스는 더 이상 입지 않는다.
저 이들은, 어제, 오늘 여군의 뉴스를 보며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으려나. 그녀를 괴롭힌 이들이 나쁜놈이라 손가락질을 하려나, 겨우 그깟일에 목숨을 버리는 여자라며 혀를 끌끌 차려나, 아니면 내 일이 아니다, 등 돌리고 있으려나. 어느 여성이 권력자로부터 피해를 당했다 호소했을 때, '왜 이제서야', '피해를 당했다면서 왜 그때는'이라는 말들을 앞에 붙이며 말들을 이어갔을까, 권력을 등에 업은 나쁜 손길에 대해 욕을 했을까.
그들이 아무 일 없이, 아무 기억의 흔적 없이 살 수 있는 세상이 참 분하다. 그들이 잊고 잊히고 있는 동안, 살아남아야 하는 이들은 각인된 기억을 어떻게든 묻어내느라 버겁다.
한참의 열기를 내뿜다 서늘해진 오늘의 저녁 공기가, 저들 앞에서 싸늘하고 무겁게 자리하길. 부질없고 기약없는 소원이지만, 그녀의 죽음 앞에서, 절실하게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