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10년도 더 지난 2012년, '의지의 차이'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T 모 아이돌 그룹의 멤버들이 어떤 한 멤버를 가지고 트위터로 뒷담화를 하는 과정에서 이 문구가 사용되면서 한때 유행어처럼 번지기도 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들이 이렇게 뒷담화를 할 만큼 모종의 사연이 그들 사이에 도사리고 있었고, 이를 보면서 나는 그들이 얼마나 답답했길래 저렇게들 트위터로 (공개적인) 뒷담화를 깠을까 싶기도 했다.
그들의 행동이 지니는 윤리성은 차치하고, 나는 이 화제를 발판삼아 '의지', 그리고 '의지의 차이'가 지니는 함의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 싶다. 나는 계속 행위~욕망~행복의 연결고리를 깨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고, 앞에서는 '5분만 더 자고싶은 마음'을 통해 욕망의 충족과 행복의 달성 사이의 연관성에 대해 살짝 터치해 보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다소 부족하다. 5분만 더 자고싶은 마음이 들어서 '자는 것'과 5분만 더 자고싶은 마음이 들지만 '자지 않는 것'은 출발 선상에서나 결과론적으로나 다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의지'라는 키워드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 5분만 더 자고싶은 욕망에 휩싸인 상황에서도 누군가는 자고, 누군가는 자지 않는다. 이는 위에서 말하는 '의지의 차이' 아닐까?
하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저 상황에 의지의 차이를 적용하기에는 뭔가가 부족해보인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의지'는 '어떠한 일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을 뜻한다. 즉, 의지라는 것은 결국 '어떠한 일'이 선제적으로 존재해야 발동될 수 있다. 그런데 '어떠한 일'이라는 것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위의 예시에서 5분만 더 자고싶은 마음이 들어서 자는 경우, 이 사람에게 '5분만 더 자서 수면욕을 채우는 일'이 중요해서 이를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 발동된 것이다. 반면, 5분만 더 자고싶은 마음이 들지만 자지 않는 경우, 이 사람에게는 '5분을 더 자지 않고 일찍 준비해서 출근, 혹은 등교하는 일'이 중요해서 이를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 발동된 셈이다.
즉, 의지는 누구에게나 있다. 다만, 의지가 발동되는 대상이 각자 다를 뿐이다. 이는 사람마다 어느 사안에 더 많은 가치를 두는가, 즉,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서로 다른 경험과 지성을 발판삼아 살아 온 서로 다른 인간들에게 가치관의 차이는 필연적으로 발생하나, 인간이라면 누구나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달리 말하면, 의지의 보편성과 가치관의 상대성이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작용함을 알 수 있다. T 모 그룹의 '의지의 차이'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그 멤버에게는, 의지가 발동되는 다른 일이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가치관이 상대적인 것은 이 논의에서 더 이상 진전시킬 필요는 없어보이고, 나는 '의지의 보편성'에 주목하고자 한다. 왜 인간은 누구나 '어떠한 일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일까? 쇼펜하우어는 인간에게 '생존'이 걸려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생(生)에 대한 의지(Will to Live)를 갖고 있고, 이것이 모든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본질적인 충동이다. 의지는 이성보다 강하며, 이성은 근본적으로 의지에 봉사한다. 그럴 듯한 주장이다. 우리는 입버릇처럼 '먹고 살려고 한다'는 말을 자주 한다. 이 말에는 생존에 대한 의지가 담겨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렇게만 놓고 보면 인간과 동물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동물에게 행위와 욕망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게다가 동물이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행복까지도 연관되어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행위~욕망~행복의 연결고리가 상당히 강한 셈이다. 먹으면, 배부르고, 기분 좋으니까. 그런데 인간은 더욱 까다롭다. 먹으면, 배부르고, 기분 좋을 수도 있지만, 먹으면, 배불러서, 기분 나쁠 수도 있는 존재자가 인간이다. 인간에게는 지성이 있고, 저 연결고리에 '가치'라는 중요한 존재가 끼어들기 때문에 무엇이든 일방향적으로 해석되기 어렵다.
니체는 의지에다가 '가치'라는 존재를 덧붙여서 '힘에의 의지(Will to Power)'를 제창한다. 이는 쉽게 말하면 더 가치를 두는, '더 높은 것'을 향한 의지를 가리킨다. 인간은 신, 도덕, 이념 등 절대적인 이성으로 추종받던 '타인의 가치'보다 내가 자발적으로 재평가한 '자신의 가치'를 더 중요시하고, 이를 발판삼아 나의 삶을 살고자 하는 의지를 근본적으로 가진다는 것이다. 이제는 흔한 말이지만, '내 삶의 주인은 바로 나'의 원류가 니체에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내가 생존에 대한 의지나, 강해지고자 하는 의지를 기반으로 행동한다고 해서, 나의 욕망이 꼭 충족되거나, 나의 행복이 꼭 보장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저 인간인 나에게는 생존에 대한 의지도, 강해지고자 하는 의지도 있을 뿐이다.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의지론은 인간의 행위를 설명하는 데 이해할 필요가 있지만, 이 논의는 욕망의 충족과 행복의 달성과의 연관성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하지만 의지가 탑재된 나는 하루에도 수많은 행위에 에너지를 소비하고, 그 행위들이 모여 어떠한 현상을 만들어낸다. 그것이 나의 욕망과 행복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면, 나의 삶에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삶에 의미란 있는 것일까?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어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