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아끼는 문장들
기억력이 좋은 편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장기 기억력이 좋으면 단기 기억력이 나쁘고 그 반대인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나는 아쉽게도 모든 기억력이 좋지 않다. 집중력도 그리 길지는 않다. 집중도의 깊이는 좋은데 오래가지 못한다. 이 성향은 산발적인 미디어를 즐기면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요즘 내 기억력과 집중력은 예전보다 길을 많이 잃기 때문이다. 나만 겪고 있는 현상이 아니라고도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현세대가 지겹도록 미디어에 대해서 ‘집중력 결핍’ 현상을 많이 앓고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넷플릭스를 보면서 아이폰으로 인스타그램을 하고 팟캐스트를 들으며 유튜브를 한다. 1가지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1개의 미디어만 보지 않는 현상이라고 알고 있다.)
이렇게 내 기억력과 집중력이 퇴화하는 이유를 합리화하고 이 이유를 반영해서 나는 기록과 메모를 예전부터 꾸준히 노력해왔다. 특히 미디어에 대해서는 짧은 시간에 잃어버리는 내용들이 점점 많아져서 그 자리에서 모든 걸 수집하려고 하는 편이다.
서론이 길었다. 일하고 있는 서점에서 우연히 나와 비슷하다고 느낀 신간을 발견했고, 그 책과 작가를 소개하고 싶다는 말이 본론이다.
오하림 작가의 <나를 움직인 문장들>이라는 책이고 자그마치 북스 출판사에서 20년도 11월에 출판했다.
7년 차 “카피라이터” 오하림 작가는 평소 메모를 사랑하는 분이라고 한다.
매년 돌아오는 본인의 생일에 수집한 문장을 엮어서 책으로 만들어 주변에 선물을 했고 그 내용들을 조금 더 다듬어 이번 책으로 출간했다.
나는 이 책의 표지보다 작가 소개에서 나와 잘 맞을 수밖에 없음을 인정했다.
무언가를 깊게 좋아하진 못하지만
얕지만 많은 것에 힘을 쏟는다
기억력이 좋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메모를 한다
모든 설명이 200% 나를 뜻하고 있다.
마지막 문장에 다른 설명을 덧붙이자면 심지어 나는 메모를 했다는 자체도 기억을 못 할 때도 있다.
목차를 보면서 더 많은 확신을 얻었고 앉은자리에서 한 번에 다 읽어냈다.
*(몇 장 찍어둔 책 내용들이 있어서 같이 소개를 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직접 읽기를 바라며 첨부하지 않겠다.)
결국 나를 만든 건 일상에 쌓인 평범함 문장들이었다
오하림 작가의 글에서는 평정심이 느껴지고 본인이 선택한 문장들을 나열해서 보여주는 단단함이 얼마나 훌륭한지 보여준다. 기록과 메모는 지극히 개인적이라서 공감이 떨어질 거라고 생각했던 내 입장을 보란 듯이 반대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적어왔던 모든 문장들도 마치 내가 이 자리에 서있을 수 있도록 지지를 보내준 것만 같아서 기뻤다.
나 또한 그랬듯이, 어쩌면 당신이 무심코 보고 지나갔던 문장들을 오하림 작가가 그녀의 시선으로 다시 짚어줄 수도 있다. 혹시라도 이 글을 읽고 책을 읽게 된다면 내가 느꼈던 동일한 즐거움을 나눌 수 있길 희망한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매일 기억하고 되새겨 보는 두 문장을 당신에게 알려주고 이 글을 마무리하겠다.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
바닷가에서 도민준의 프러포즈를 받은 천송이가 이렇게 말한다.
“완벽하게 행복하다.”
인생에서 완벽하게 행복한 순간이라니. 그 순간만큼은 천송이가 세상에서 제일 부러웠다. 나는 ‘행복하다’ 앞에 ‘완벽한’이라는 수식이 올 수 있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었다. 항상 잘 된 일에도 의심을 먼저 하기 일쑤라 어떤 일에도 완벽하다는 말을 붙이지 못했다. 하지만 이 대사를 듣고 난 후에는 어느 정도 내 삶의 일정 부분이 완벽하다는 말로 채워지고 있는 중이다. 이 대사가 내포하고 있는 감정을 당신도 공감했으면 좋겠다.
독립영화 <벌새>
“은희야. 힘들고 우울할 땐 손가락을 봐.
그리고 한 손가락, 한 손가락 움직여.
그럼 참 신비롭게 느껴진다?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은데,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어.”
주인공 은희에게 한문 선생님 영지가 하는 대사다. <방구석 1열> 프로그램에서 영지 역할을 맡았던 김새벽 배우도 이 대사를 한 번 더 언급했을 만큼 영화 <벌새>의 팬이라면 모두 공감하는 대사다. 영화를 보면서 괜히 내 열 손가락을 움직여봤던 기억이 있다.
기본적으로 운동 부족이지만 붓기에 취약한 몸이라 잘 붓는다. 특히 서점과 카페일을 같이 하게 된 뒤로는 자고 일어나면 손과 발이 퉁퉁 부어있다. 무의식적으로 눈을 뜨는 일보다 먼저 손과 발을 천천히 움직이며 잠에서 깨어나곤 하는데, 그 행동이 ‘내가 살아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한다. 그러고 나면 오늘 하루 동안 무슨 일이 생겨도 모두 헤쳐나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 그 기분이 꽤 상쾌할 때가 많아서 당신에게 알려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