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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디마 Jul 27. 2024

임신한 당신이 알아야 할 모든 것

육아를 책으로 배웠습니다.




미디어와 임신


어릴 적 부모님이 보시던 드라마를 보면 말이죠. (라떼는 말이야) 주인공은 항상 이런저런 관계로 얽히고설켜서 함께 사는 가족이었습니다. 한 가정은 서양식 2층 단독주택에, 다른 한 가정은 조금 가난한 대청마루가 있는 한옥 같은 구조의 집에 살고 있죠. 부잣집 아들과 가난한 집 딸이 메인 커플인 드라마는 이 가족의 이 커플, 저 커플의 이야기를 돌아가며 보여줍니다.


이런저런 문제가 진행되던 어느 날. 며느리가 식사 준비를 하다가 갑자기 "우욱!" 구역질을 합니다. 따라란~ 시어머니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은 비장한 눈빛을 주고받습니다. 그리고 바로 나오는 시어머니의 한 마디. "너... 혹시...?" 그다음 장면은 2층에 있는 신혼부부의 방입니다. 맞은편엔 장롱이 있고 꽃이불이 깔린 퀸 사이즈 침대에 앉은 남편은 아내의 배를 만지며 기뻐합니다.


이게 제가 임신에 대해, 그리고 입덧에 대해 알고 있는 고정관념이었습니다. 너무 어이가 없나요? 그렇게 일찍 결혼하거나 임신한 것도 아니건만, 제 주변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친구가 극히 드물었어요. 유일하게 일찍 결혼하고 아이 둘을 낳은 친구는 먼 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아이가 있는 가까운 친척마저 없었고요. 임신이 뭔지, 육아가 뭔지 간접체험조차 해 볼 기회가 없었던 셈이죠.



임신을 하면 입덧으로 헛구역질을 한 번 한다.
그 뒤로는 행복하다.



임신한 후에야 의식 속에 이런 어이없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헛구역질이 한 번으로 안 끝나더라고요? 24시간 내내 폭풍우에 흔들리는 배에 타서 내릴 수도 없이 3개월을 쉬지 않고 항해를 하더라고요? 와! 사람 환장하네!


당시 저는 다니던 회사를 휴직하고 한창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대학원 입학을 위해 영어 스피킹 시험을 보고 온 날, 처음 해 본 임신테스트기에서 당황스러운 두 줄을 보았습니다. 작은 콩알 같던 생명체가 내는 심장소리를 들어본 분은 알 겁니다. 육체에 실린 연약한 이성일뿐인 우리에게 그 생명의 신비라는 것이 얼마나 큰 본능적 감동으로 다가오는지를요. 부모가 될 준비를 하지 않았던 사람에게라도 말이죠. 산부인과에서 처음으로 쿵쿵거리는 아이의 심장소리를 듣던 순간, 순식간에 눈시울이 뜨겁게 차오르던 그 기분을 을 수가 없습니다.





감동은 짧고 입덧은 길다


그. 러. 나 감동은 짧고, 입덧은 길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저는 입덧이 없는 타입은 아니었어요. 임신 7주 차 정도부터 시작된 입덧은 거의 20주가 다 되어갈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먹는 즐거움이 사라진 세상에는 그 어느 기쁨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먹을 수도 없는데 안 먹어도 아픈, 이 놀랍도록 새로운 고통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어요. 매일 24시간 속이 뒤틀리는 고통이 지속됐습니다. 아픔 때문에 새벽에 자다가도 깨어나곤 했습니다. '이렇게 괴로울 바엔 아이를 낳지 않는 게 낫겠다'는 몹쓸 생각도 해봤습니다. 냄새 때문에 부엌에는 출입조차 할 수 없었고 당시 요알못(요리를 알지 못하는)이던 남편도 함께 빼빼 말라갔죠. 임신 전 52kg이었던 제 몸무게는 3.43kg의 우량한 아이를 낳기 직전 만삭에도 58kg에 불과했습니다. 입덧 다이어트를 한 셈이랄까요.




'이렇게 괴로울 바엔 임신을 안하는게 낫겠어' 생각하며 잠 못이루던 날들





20주가 넘고 안정기에 들어선 후에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입덧의 고통이 잦아들었습니다. 그 무렵 동기 언니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멀리 살아서 만날 수는 없었지만 언니는 카톡으로 '임신소양증'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임신소양증은 임신으로 인해 생긴 피부 가려움증입니다. 임신 중에는 함부로 약을 쓸 수 없기 때문에 그 어떤 증상이 나타나든 10개월이 차기까지 버티는 수밖에 없죠.


그러고 보니 임신은 드라마에서 비치듯 행복하기만 한 시기는 아니었습니다. 여러 번 계속된 습관성 유산으로 고민 중인 친구, 조산 위험으로 누워서만 지다는 사람, 호르몬으로 인한 각종 변화들.... 과거의 미디어가 보여준 것은 '나이가 들면 결혼을 하고, 결혼을 하면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게 곧 행복이다'라는 일방적인 주입이었습니다. 모두가 당연히 그래야 할 것처럼 해오던 관습에는 개인이 겪어야 할 변화와 고통에 대한 논의는 빠져있었습니다. 소셜미디어의 등장으로 육아와 출산의 힘듦이 다발적으로 공유된 지금에야 개인이 당연히 감내해야 할 것처럼 숨겨져 왔던 어려움이 드러난 것 같습니다. 홀로 하는 육아의 외로움, 자유의 상실, 출산의 고통, 치솟는 교육열로 인한 재정적 압박감 등이요. '속았다.'는 기분. 제가 느낀 감정은 그거였습니다. '임신은 행복하기만 한 것'이라고 각색되고 주입된 미디어에 대한 반응으로요. 대국민 사기극, 아니, 대여성 사기극에 뒤통수 후드려 맞은 억울함이요. 다른 사람들도 느끼지 않았을까요? 지금의 곤두박질쳐버린 출산율이 그 증거가 아닐까요?





임신한 당신이 '진짜' 알아야 할 모든 것


임신 안정기를 보내는 동안 본 영화가 있습니다. 카메론 디아즈, 엘리자베스 뱅크스, 안나 켄드릭, 제니퍼 로페즈와 같은 할리우드 스타들이 대거 등장한 <임신한 당신이 알아야 할 모든 것 What to Expect When You're Expecting>입니다. 영화는 다양한 임신과 출산의 모습을 조명합니다. 임신출산 전문가로서 아이를 갖게 된 부부, 결혼 생각이 없었으나 덜컥 임신이 되어버린 커플, 하룻밤의 불장난으로 생기게 된 아이, 오랜 시간 기다림 끝에 입양을 결정한 부부 등. 누군가에겐 임신이 간절함과 기쁨으로, 또 다른 누군가에겐 당혹스러움으로 다가옵니다. 영화는 여러 커플을 주인공으로 삼아 임신 직전의 상황에서부터 아이가 태어나는 그 순간까지의 다양한 경험을 비춥니다.




<임신한 당신이 알아야 할 모든 것 What to expect when you're expecting>



특히 임신에 관한 일을 하며 오래 아이를 기다려온 한 커플은, 임신 중 겪을 수 있는 어려움을 고스란히 (아니, 어쩌면 조금은 과장되게요.) 보여줍니다. 엘리자베스 뱅크스가 연기한 웬디는 임신과 출산에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2년간 자신 부부에게도 아이가 생기길 기다려왔죠. 그러나 기대하던 임신과 직접 겪은 임신은 달랐습니다. 체중의 증가와 임신 중 복부 압박으로 인해 수시로 화장실을 들락거리다 심지어는 임신에 관한 강연을 하기 전에 옷에 실수를 하고 말죠. 간신히 다른 사람의 옷을 빌려 입고 강연을 시작하지만 강연 중 방귀 실수까지.... 평소 '임신은 마법같이 행복한 경험'이라고 말하던 주인공은 강연 중 "임신은 쒯이다! Pragnacy sucks!"까지 내뱉고 맙니다. '내 커리어는 다 끝났다' 싶던 그때, 누군가 SNS에 올린 이 강연이 대박이 터집니다. 임산부들은 행복한 척하도록 사회가 강요한 임신과 출산의 '숭고함'을 쒯suck으로 표현그녀에게 공감과 격려의 박수를 보냅니다.


힘듦은 내뱉어버리면 공감을 받고, 공감 상처를 치유합니다. 정신과 의사인 윤홍균 작가님이 쓰신 <마음지구력>에서는 공감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나만 겪는 게 아니구나!' 깨닫게 하는 공감의 메시지가 감정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요. 영화의 사연들은 행복을 강요당한 미디어만 보아온 우리에게 '그럴 수 있구나', '나만 힘든 게 아니구나'는 위로로 다가옵니다.


여기까지 진지하게 말해왔지만, 실제 영화는 매우 유쾌하고 발랄합니다. 제일 인상 깊은 장면은 육아하는 아빠들의 모임인데요, 아기띠를 메고 유모차를 끌고 등장하는 젊은 아빠들의 모습은 육아특공대를 방불케 합니다. 빵빵 터지는 영화니 가벼운 마음으로 보시길 추천합니다. 임신 중인, 혹은 임신을 경험한 모두가 공감하며 즐겁게 볼 수 있는 영화입니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은 이 모든 역경을 거쳐 감동적인 출산의 장면에서 끝이 납니다. 임신은 쒯이지만, 출산의 고통도 쒯이지만, 맞아요. 생명의 탄생은 아름답습니다. 그 기다림의 시간을 다 잊어버리게 할 만큼 심장을 조이는 감동이 있습니다. 물론, 그 뒤에도 출산과 육아의 고난은 계속됩니다만. 미디어와 어른들에게 속아 더 이상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디폴트가 된 딩크 후배들에게 속시원히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네요. "그래, 아이는 안 낳아도 돼. 개 힘들어. 근데, 또 낳아보면 세상에 내가 이렇게나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게 놀랍다? 한 번 낳아본 후로는 다시 못 돌아가. 이미 알기 때문에 고통스러워도 또 이 짓을 할 거야." 이렇게 해서 엄마들은 번식의 본능에 충실한 또 하나의 동물로 재탄생하게 되는 겁니다. 모든 일에는 힘듦만큼의 사랑이, 명암이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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