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형 인간의 사회생활>을 읽고
초등학교 시절부터 난 내 성격이 퍽이나 별나다고 생각했다. 40분 수업 10분 쉬는 시간의 무한 반복이라든지, 한 명이라도 늦게 나오면 오리걸음으로 시작했던 체육 시간처럼, 학교에는 독립적인 개인주의자인 내게는 의문투성이인 일들로 가득했다. 게다가 학교에서는 나의 ‘활발함’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했다. 매년 돌아오는 학기 초, 단 몇 시간 만에 1년간 함께 다닐 무리를 형성하는 일은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난 주변 사람을 오랜 시간 관찰하고, 그 사람이 내 마음에 천천히 스며들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다. 그런 내게 하루아침에 마음에 드는 친구를 간택하라니. 내가 별나게 느린 걸까, 아니면 사회가 별나게 빠른 걸까? 둘 중 어느 쪽이든 상황이 바뀔 리는 없지만 말이다.
그때 머리에 두른 띠가 있었다면 아마 ‘소외되지 않기’라 적혀 있었을 것이다. 언제 배제될지 모른다른 두려움 때문에라도 내 상태와 생각이 투명하게 드러나지 않도록 말수를 줄였다. 체질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명을 늘어놓으면 까다롭고 어울리기 힘든 사람이라는 인상을 줄 것 같았다.
-I형 인간의 사회생활 中-
성인이 되어서도 외향성을 끄집어내야 하는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대학생이 되고 동아리, 대외활동 면접에서 나는 내가 얼마나 활발한 사람인지, 소위 말하는 ‘인싸’임을 증명해야 했다. 취업 면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사람 만나길 좋아하고,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성격. 그것이 기업이 원하는 인물상이었다. 덕수궁 한 귀퉁이에서 조용히 바람을 쐬고, 휴일에는 독립서점 탐방을 하며 기력을 보충하는 내향형 인간을 사회는 원치 않아 보였다.
오늘 읽은 <I형 인간의 사회생활>은 미래의 내 모습을 미리 체험하는 것 같아 공감이 갔다. 외향성을 강요받는 사회에서 내향인은 주류가 되기 위해 외향인처럼 보이는 가면을 쓰느냐, 또는 비주류인 내향인으로 남을 것이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 작가님이 다녔던 광고회사는 자기 PR이 중요한 곳이니 외향적이어야 할 것만 같은 압박이 더 했을 것이다.
꼭 정답을 맞혀야 하는 순간이 아니더라도 어느 집단이든 당신이 우리와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라는 요구는 끊이지 않았고 강도는 점차 심해졌다. 작게는 좋아하는 음식과 취미 같은 취향, 크게는 인생의 목표와 가치관까지 어느 하나 모난 지점이 없어야 이상 없다는 증명을 받아 무난하게 집단에 편입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부터 내 생각과 존재를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건 더더욱 상상하기가 어려워졌다.
여러 대외활동과 팀 프로젝트를 거치고, 리더를 맡으며 내 성격은 예전보다 외향적으로 바뀐 측면이 있다. 이젠 처음 만난 사람들과 스몰톡을 하며 곧잘 친해지기도 하고, 일을 주도하는 데도 능숙하다. 새로운 환경에서 나를 만난 사람들에게 때때로 내 mbti가 확신의 ‘E’일 것 같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이 정도면 사회에 잘 적응했다고 볼 수 있을까? 외향성이라는 가면을 들고 서 있는 내향적인 나는, 억지로 취향에 맞지 않는 나물을 잔뜩 먹고 선생님께 골고루 밥을 먹었다고 칭찬을 받는 어린아이가 된 것만 같다.
외향성과 적극성, 내향성과 수동성은 동치 관계가 아니다. 외향적인 사람이 적극적으로만 일하고, 내향적인 사람이 소극적으로만 일할 것이라는 생각은 명백한 편견인데, 많은 사람들이 이 지점을 오인하여 ‘적극성’을 요구하는 대신 ‘외향성’을 강요한다. 나는 내향적이지만 대학 시절 그 누구보다 맡은 일에 적극적인 사람이었다. 사적인 영역에서는 고요하지만, 내 분야에서만큼은 큰 목소리를 내고 활보한다.
차디찬 결빙 같던 내향인에서 사회에 의해 반강제로 외향적인 면모를 지니게 된 나는 미지근한 맹탕이 되고 말았다. 찬물과 따뜻한 물의 어느 중간에 위치한 지금, 먼 훗날 내가 사회에 진출해 누군가의 선배가 되었을 때는 각기 다른 온도를 가진 사람들을 품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