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아닌 생각 #5
"아메리카노에 시럽을 넣어먹는 이유가 뭐야?"
꽤 오래전의 얘기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면 꼬박 시럽을 넣어먹는 친구가 있었다. 두 번도 아니고 세 번도 아니고 꼭 한 번 펌핑을 했다. 이렇게 넣으면 쓴 맛이 안 느껴진다나 뭐라나.
나는 쓴 맛에 단 맛을 섞으면 단쓴단쓴이 될 거라 생각했다. 마치 단 맛에 짠 맛을 섞으면 단짠단짠이 되듯이 말이다. 아니 애초에 느끼한 헤이즐넛 향이 혀 끝에 멤도는 게 싫어서 커피에 시럽을 넣어 먹는다는 발상을 감히 하지 않았다.
그러나 궁금해 한 모금 마셔본 친구의 커피에서는 정말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약간의 텁텁함은 남아있었지만 시럽의 단맛도 커피의 쓴맛도 둘다 느껴지지 않는 무(無) 맛이었다.
나는 '아메리카노는 쓰려고 먹는거 아니냐, 밍밍하게 먹으면 기호식품으로서의 본질을 잃는거 아니냐, 그럴거면 차라리 달게 먹는게 낫지 않느냐.' 하며 애교 반 진심 반 어기댔다.
친구는 쓴 맛이 싫다고 했다. 얼굴을 찌푸리면서까지 마셔야하냐고 되물었다.
거기다 대고 나는 커피는 자고로 써야 정신이 번쩍드는 거라고 말 하면서, 친구의 무 맛 아메리카노를 끝내 존중하지는 않았다.
"커피를 마실거면 쓰게 먹던가... 달게 먹던가?"
안정적인 하루가 연이어 계속되면 그것을 단조롭고 메마른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자극 만을 좇는 삶을 살지는 않았지만 지루한 삶은 싫었다. 그러나 어떠한 자극이든 그것이 안정 궤도에 들어서는 순간 둔감해질 수 밖에 없기 마련이라, 또한 지루할 수 밖에 없었다. 지루함 삶 아래에서는 대안적 삶, 즉 기회비용에 대한 생각이 자꾸 떠오르기 마련이라, 또한 불만족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안정적인 삶을 싫어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불만족스러운 삶이 싫었다. 그리고 사소하지만 결코 잊혀지지는 않는 불만들이 누적되고, 좀처럼 즐거워지지 않는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부담이 될 때마다, 나는 자꾸만 기회비용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커피는 쓰거나 달아야 한다. 자극을 얻고자 커피를 마시는 건데, 맛이 밍밍하다면 그 돈주고 굳이 커피를 사 마실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내가 놓치고 있었던 것은 밍밍한 커피에도 어쨌거나 카페인은 그대로 들어있다는 점이었다.
"샷 추가해주세요. 시럽은 빼고요."
결핍의 상태가 매력적인 이유는 그것이 쓰지만 동시에 가능성의 상태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뭔가를 잔뜩 먹어 배부른 상태보다 허기에 시달리며 음식점을 찾아다니는 순간을 좋아했고, 여행을 가있을 때보다 빡빡한 일정 속에 여행 계획을 짤 때를 더 좋아했다. 이유 모르게 삶이 힘들 때마다 결핍의 상태를 찾고자 했던 이유다.
그리고 이십대 초반의 나는 불만족스러운 삶을 견디지 못해 결핍의 상태로 되돌아가기로 했다. 아메리카노에 시럽을 넣던 친구에게 작별을 고하고 혼자로 되돌아갔다.
모난 돌이 어디껴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 아예 무너뜨리고 주춧돌부터 다시 쌓아올리는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나보다. 어쩌면 모난 돌의 존재 자체가 나만의 상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나는 밍밍한 커피가 좋아. 마시기 편하잖아."
결핍의 상태를 틈 타고 곪아있던 문제들이 연이어 터져나왔다. 인식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던 바람에 미처 예상도 못했던 문제들이었다. 잠복기간 마냥 숨어있다가 내가 가장 취약할 때를 노렸나보다. 계획했던 대로 주춧돌을 쌓아올리기는 커녕, 돌무더기 위에 구르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리고 그 기간이 길어져 결국에는 골병을 앓게 되었다.
어쩌면 나는 몰랐나보다. 내 인생이 무맛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쓴 맛이었다는 것을. 누군가가 짜넣어준 시럽 덕에 나는 쓴 맛을 모르고 살았던 것이다. 내가 무미건조하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은 실제로는 누군가의 노력 덕에 견딜만해진 것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그저 텁텁함이 싫다고 불만을 가졌다.
밍밍한 인생이 그리워졌지만, 후회하기에는 늦었다.
수 년이 지나고 모든게 괜찮아지고 난 뒤 어느 날이다. 매일 하던 것처럼 독서실 밑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러 키오스크 앞에 섰는데, 문득 테이블 위의 시럽병이 눈에 띄었다.
아메리카노에 시럽을 펌핑해 넣어보았다.
단 한 번 꾸욱.
써야 할 커피에서 정말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약간은 텁텁하지만 굳이 말하자면 무(無) 맛이다. 단번에 쭉 들이키는데 쓰다고 얼굴 한 번 찌푸려지는 일이 없었다.